5월 7일 조정민 목사 - 성결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조정민 목사
성결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신명기 21장 1~14절
남을 위해 기도해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고 책임을 질 일도 없지만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이고 공동체의 현주소입니다. 공동체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뜻밖의 일이 자주 발생하는 곳입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그치지 않는 것이 공동체의 실상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보면 의문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거스른 중죄를 지었는데 누가 그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고 시신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차지하라고 주신 그 땅에서 사람이 죽어 들판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으면 너희 장로들과 재판관들이 나가서 그 시체와 가까이 있는 성들 간의 거리를 측정하라.(1~2절)”
당시에는 의문의 시신이 발견되면 시신이 발견된 장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성읍에서 책임을 지고 장로와 재판관들이 나가서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번거러운 일이 생겼지만 그 일이 발생한 지역에서 처리를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그 일을 맡을 것인가. 진정한 공동체라면 그 일이 발생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있는 사람이 그 일을 처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이라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 항상 일어나지만 그 일을 내가 봤고 알았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자청해서 감당하는 곳입니다.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내가 조용히 수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각자 맡겨진 은사에 따라 섬겨야 합니다.
책임을 조용히 수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고 시체 가까이에 있는 그 성의 장로들은 아직 일해 본 적 없고 멍에를 멘 적도 없는 암송아지를 가져다가 한 번도 갈지도 심지도 않은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로 데려가서 그 골짜기에서 그 암송아지의 목을 부러뜨리라.(3~4절)”
한 번도 일해본 적이 없는 암송아지,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는 암송아리를 데려다가 살인사건의 죄를 묻습니다. 이러한 의식의 기본 목적은 죄를 사하고 공동체의 화목을 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회사와 가정, 나라와 민족에도 이러한 제물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짐승에게 책임을 지웠습니다. 암송아지의 목을 부러뜨리는 행위는 어리석고 한없고 의미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인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누군가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서 암송아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주어져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약에서는 끊임없는 삶의 사건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야 하고 모든 죄를 사하셔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께서 이 땅을 보면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탄식이 나고 통곡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상황을 책임지고 해결해야 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으로 오실 때는 마치 오뉴월 거름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런 죄의 바다에 빠져서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 지셨습니다.
“레위 자손들인 제사장들이 그리로 나아올 것이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로 여호와를 섬기게 하고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 주시려고 그들을 택하셨다. 모든 소송과 모든 분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다. 시체 가까이에 있는 그 성의 모든 장로들은 골짜기에서 목을 부러뜨린 그 암송아지 위에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하라. ‘우리 손들이 이 피를 흘리지 않았고 우리 눈들도 그 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구속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이 속죄하는 것을 받아 주시고 주의 백성들에게 그 죄 없는 사람의 피에 관해 묻지 마소서.’(5~8절)”
재판이 진행되고 죄를 물어가는 과정에서 레위 자손들은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모든 절차가 정해진 대로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는가에 대해 감독 역할만을 할뿐이었습니다. 레위 자손이 재판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시종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장로들은 우리가 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암송아지를 잡는 것은 살인사건이 우리와는 어떤 관련도 없지만 암송아지가 그들의 죄를 대신해 속죄했고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속죄물을 받으시면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피가 흘려지면 그 피는 피로밖에 갚을 길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대원칙 ‘누군가 대신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에게 피 흘림을 당할 것이다.(창 9: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 사람이 피를 흘렸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대속의 죄를 갚을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흘린 피는 사람으로밖에 갚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참으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히 9:22)”
누군가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대원칙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군가 대신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고 대속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지속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를 대신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문제입니다.
세상 문제가 왜 이리도 복잡하게 얽혀서 해결되지 않을까요. 세상 문제는 정치, 경제가 해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하겠습니까. 죄인이 무슨 능력으로 구원할 수 있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죄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죄를 해결할 수 있고 죄를 대속할 수 있을 뿐 누가 죄의 문제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점점 복잡해지고 더 많아지고 어려워지고 교묘해지고 교활해 질뿐입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 살인범이 잡히고 교도소가 많이 세워진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죄를 처벌하지만 처벌받는 죄인이 승복하지 않을 뿐입니다. 네가 나를 처벌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덮고 죄를 사랑으로 대속할 수만 있다면 죄인은 반드시 돌아오게 됩니다. 자녀가 바르게 자랄 수 있는 것도 부모가 자녀의 죄를 대속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가 유리창을 깨면 자녀를 대신해 유리창 값을 물어줍니다. 부모가 자녀를 감싸면 언젠가는 돌아옵니다. 하지만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한다면 그 자녀는 퇴학당하고 사회에서 영영 소외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중보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대신 책임지고 속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른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대신 죄를 지겠느냐, 네가 대신 죄를 사할 수 있겠느냐,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책임할 뿐입니다. 어떤 일이 터지면 책임지지 않으려고 훈련받는 것이 교육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일을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대신하지 않아도 될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이 내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프리카로 떠나고 어떤 이유로 중동땅으로 가겠습니까. 누가 환영하는 것도 아니고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먹을 것이 변변하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선교지를 봤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물과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 비전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으로 오심으로 인해서 생긴 비전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깨달을 수 없는 비전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책임을 회피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지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숙해 질 수는 없어
공동체 훈련이란 책임지는 훈련입니다. 대신 책임지는 훈련, 변명하지 않는 훈련입니다. 대신 책임지는 사람이 어떤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동체 없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도 미숙한 존재입니다. 진정한 성숙은 믿음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교회를 경험할 때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보기도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웃과 가정을 위해서, 돌아오지 않는 이웃의 남편을 위해, 가출해 있는 다른 가정의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성숙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숙해 질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고서는 성숙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는 우리를 성숙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성숙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억울한 누명을 쓸 때가 있습니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 이러한 경험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아직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공동체와 교회, 가정에 속해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일을 얼마나 많이 겪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가 성숙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계획이고 축복이신 줄 믿으십시오. 우리는 그렇지 않고서는 성숙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스스로 그 죄 없는 피를 흘린 죄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으니 말이다.(9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책임을 지는 일, 다른 사람을 대신해 책임을 지고 고생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일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 그 일의 최고점에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옳은 일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네가 네 원수들과 싸우러 나갈 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손에 넘겨주셔서 네가 그들을 포로로 잡게 되었는데 만약 그 포로들 가운데 아름다운 여인이 있는 것을 발견해 마음이 끌린다면 너는 그녀를 네 아내로 삼아도 된다. 그녀를 네 집으로 데려와 머리를 밀고 손톱을 깎으며 그녀가 잡혔을 때 입었던 옷을 벗게 하고 네 집에 살며 자기 부모를 위해 한 달 동안 애곡하고 나면 너는 그녀에게 들어가서 그 남편이 되고 그녀는 네 아내가 될 것이다.(10~13절)”
전쟁 중에 여인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많이 생기겠습니까. 하지만 유대인 백성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여인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포로로 잡혔을망정 그 여인을 정중하게 대하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격렬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자들이 성적으로 폭력적이 되고 겉잡을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라도 여인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이런 율법을 받았을 때 어느 민족보다 자부심이 강했을 것 같습니다. 주변 나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도덕적 기준을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전쟁터에서 여인을 취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라는 명령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크리스천의 윤리나 도덕적 기준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법적 질서를 넘어서는 윤리적 도덕적 체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준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중보기도의 핵심은 내가 먼저 책임지는 것
“그런데 네가 그녀를 기뻐하지 않으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가게 하고 결코 돈을 받고 그녀를 팔지 마라. 네가 그녀를 비천하게 했으니 그녀를 종으로 여기지 마라.(14절)”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고 천하게 만듭니다. 자칫하면 남편과 아내를 쉽게 여깁니다. 일평생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종이나 하녀처럼 여깁니다. 되레 그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하다가 이혼하겠다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크리스천들은 내가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중보기도의 핵심도 내가 먼저 책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도 그런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해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고 책임을 질 일도 없지만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기도제목과 비전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정성진 기자 jun@onnuri.org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