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흩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아시나요?

중국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 일본 ‘재일한국인’
7월7~11일, 제2회 한민족 디아스포라세계선교대회
오는 7월7일~11일 횃불선교센터에서 ‘2014 제2회 한민족 디아스포라세계선교대회’가 열린다. 디아스포라대회는 해외에 살고 있는 한민족 동포들을 초청해 민족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깨우는 대회다. 또한 현지 언어와 풍습에 익숙한 그들을 선교사로 세우는 場이다.
전 세계 175개국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흩어져 살고 있다. 130여 개 국에 퍼져 사는 중국인, 100여 개 국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보다 더 넓게 퍼져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만들어진 배경에 슬프고 아픈 우리의 근대史가 있다. 격동의 세월, 배고픔과 가난, 일제의 박해로 고향을 떠나 타국으로 이주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발길을 따라가 본다.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이주 초기 농사짓는 고려인들의 모습

이주 초기 농사짓는 고려인들의 모습

강제이주 이동경로(출처-인터넷)

강제이주 이동경로(출처-인터넷)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분산(分散), 이산(離散)’을 뜻한다.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이다. 지금은 유대인에 국한하지 않고, 특정 민족 집단이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시작됐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이주부터 일제강점기 강제연행된 사람들, 농장의 노동자로 건너간 노동자(미주 하와이, 중남미), 일제의 박해를 피해 떠난 이주민(만주, 연해주, 중국, 미주 등) 등 흩어지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1960년대 이후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 광부 등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을 선택한 형태도 있다.
지역별로 그들을 부르는 말도 다양하다. 중국(만주, 연변 등)에 거주하는 ‘조선족’, 사할린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한 ‘고려인’, 일본의 ‘재일한국인’등이 바로 그것이다.

 

슬픈 이민史의 시초, 중국 조선족

 

조선족의 만주 이주는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860년대와 70년대 계속되는 재해와 흉년으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때 비옥한 간도 지방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1910년 한일병탄은 해외 이주를 더욱 가속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토지조사사업’(토지를 신고한 사람에게만 소유권을 인정한 제도. 신고하지 않은 토지에 대해서는 국유화한 후 일본인에게 되팜. 일제에 불만이 있거나 근대법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신고를 안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농민들이 급격히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이란 명목으로 소작농이 급증했고, 조선의 곡식은 모조리 일본 제국주의에 사용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를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선족을 대거 이주시켰다. 1945년에는 조선족 인구가 145만 명에 이르렀다.
해방 후 조선족은 중국의 공산화 과정 속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족과 중국 공산당 관계는 초기에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1968년 문화대혁명 때 많은 지식인과 학자, 기술자가 대거 숙청되고 학교가 폐교되고 소수민족의 문화를 말살됐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도 피해를 입었다. 조선인 3천여 명이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족은 생존하기 위해 중국 중앙정부의 지시에 철저히 따랐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피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 자치구는 산아제한 정책에 순응해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등 생존을 위해 애썼다. 조선족은 강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사회에 잘 적응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1980년 이후에는 경제개발로 인해 농촌의 조선족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했다. 중국 내 뿐만 아니라 러시아, 일본, 한국, 미국 등으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이동했다.
조선족 디아스포라는 중국 내 소수 민족 선교와 한족 선교, 북한 선교에 있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족은 특히 북한 출입이 자유로워 북한에 다양한 형태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소수민족이라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소수민족 선교에도 큰 진전을 보이고 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세워진 조선족 선교사는 중국의 복음화와 북한교회 재건에 큰 역할 기대할만하다.

 

강제 연행된 노동자, 일본 재일동포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유언비어가 나돌아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인들의 실업문제가 커지자 조선인들의 이주를 막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 이주한 한민족은 1944년에 200만 명에 달했다. 조선에서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군수산업을 지탱할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동원하기 시작했다. 탄광, 광산, 위안부로 약 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끌려갔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1950년까지 약 104만 명의 한인들이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한국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 경제적 이유(맥아더장군이 일본거주 외국인들의 국외 반출금액을 천엔으로 제한, 재산형성한 재일한국인들이 포기하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음), 당시 한국 내 정치혼란(극심한 좌우대립) 등으로 많은 재일동포들이 귀환하지 않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우리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나라다. 그러나 동반자적 관계를 갖고 미래 국제사회를 위해 공조해야 할 나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선교사로 세워진다면, 일본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것이다. 그들로 인해 일본 교회가 부흥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일본으로 탈바꿈하도록 돕는 주역이 될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디아스포라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시기별로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1863년~1884년), 2단계(1884년~1905년), 3단계(1905년~1917년)다. 1864년 65명의 한인들이 조선 정부 몰래 러시아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한 것이 시초다. 러시아 내 비옥한 토지가 증가하는 한인들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이주금지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1870년대 말 연해주와 아무르주 21 마을에 거주하던 한인 이주자는 약 7천여 명에 이르렀다(1단계).
이주하는 한인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러시아는 이주민들을 내륙으로 이동시켰다. 변방 개발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한인 이주자들에게 농민계급을 부여하고, 한 가구당 50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했다. 조세의 의무도 부여됐다(2단계).
러일전쟁(1904~1905년)과 한일병탄(1910년)으로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가속화되었다(3단계). 이때부터 본격적인 이주사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기근과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떠났다.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한인들에게 시련이 닥쳤다. 1937년, 러시아 내 타민족에 대한 대량살상과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그 첫 번째 대상이 고려인들이었다. 고려인 강제 이주를 시작으로 게르만족, 쿠르드족, 타타르족, 폴란드족, 체첸족의 강제이주가 이어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고려인을 가장한 일본첩자의 침투를 막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구소련 전체주의 사상이 배경이 었다.
1937년 8월 21일. 연해주 거주 고려인 전원이 카자흐스탄, 아랄해 부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재산을 처분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열악한 화물객차와 가축차량에 실려 이주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이 60%가 사망했다. 그렇게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전역과 러시아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주역이다. 고려인 디아스포라들이 선교사로 세워지면 중앙아시아에서 새로운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노동자, 입양, 유학으로 비롯된 미주 이민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는 사탕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고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노동력을 조달했다. 1882년 중국정부가 해외 이민을 금지하자 일본인들이 대용노동자로서 대규모 이민을 오기 시작했다. 숫자가 많아진 일본인들이 처우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하와이 당국은 일본인들의 비중을 낮추기 위해 조선인 노동력으로 눈을 돌렸다. 기근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조선인들은 하와이행 배로 몰리게 된다.
하와이 초기 이민 역사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다. 알렌 선교사는 1902년 이민원을 설립,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모집이 지지부진하자 인천 내리감리교회의 존슨 목사의 도움을 얻어 하와이 이주를 추진했다. 1902년 12월 12일 101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행 배에 몸을 실었다. 초기 이민을 주도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하와이 초기 이민사회는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이민 노동자들은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점심시간은 겨우 30분. 잡담금지에 채찍으로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받은 하루 일당은 1불25센트. 적은 임금과 팍팍한 노동 현장이었지만, 그 돈을 아껴서 독립자금으로 또 친정으로 송금했다.
해방 이후 미주 이민은 입양, 유학생, 미국 가족으로 다양해졌다. 2002년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는 15만 명으로 이중 10만 명이 미국으로 입양됐다. 재미한인의 5%에 달한다. 1960년대 이후 미국 유학생들의 숫자도 늘었는데, 그들은 학위취득 후 미국에 머물렀다. 그리고 본국의 가족들을 초청하는 연쇄이민이 늘었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디아스포라들은 북한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한국정부와 한국인이 할 수 없는 북한선교를 미주교회들은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통일한국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을 미주에 보내신 이유일 것이다.

 

돈 벌러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

1968년 파독간호사(이승지氏모습(출처_한국이민사박물관)

1968년 파독간호사(이승지氏모습(출처_한국이민사박물관)

 

파독 근로자와 간호사 이주는 1960년대 후반 한국경제발전과 더불어 생겨났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돈과 기술이 필요했다. 때마침 유럽은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이 부흥하고 있었다. 노동력이 모자랐던 독일과 ‘기술원조협정’을 체결, 한국인 노동자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파독 이주의 시작이다.
독일 파견을 위해 1962년 정부는 ‘해외이민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12월 247명이 독일행 비행기를 타고 첫 집단 취업을 했다. 1차로(1963~66년) 2,519명이, 2차(1970~77년)로 4,219명이 독일로 갔다.
간호사 파견은 처음엔 민간 주도(1950년대~1966년)로 이뤄졌다. 한국과 독일 가톨릭교회의 협조로 65년까지 약 870여명의 간호사가 이때 파견됐다. 두 번째 시기(1966년~69년)는 정부와 민간 합동으로 이루어졌다. 세 번째 시기(1970년~76년)는 제1,2차 간호협정에 의해 약 7,033명의 간호요원들이 파견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파독근로자들 앞에서 눈물 흘린 일화가 유명하다. 이주민 1세대들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켰다면, 2세대들은 유럽의 교회를 깨워야한다. 유럽은 종교개혁의 본지이지만 교회가 쇠퇴해가고 있다. 2세 디아스포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 선교사로 세워져야한다. 그래서 유럽의 교회와 세계 선교를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

 

디아스포라에 관심 가져야 하는 이유

 

민들레는 예로부터 9德을 지닌 팔방미인이라고 했다.
‘나쁜 환경을 견뎌내는 인(忍), 뿌리가 잘려도 새싹이 돋는 강(剛), 꽃이 한꺼번에 피지 않고 차례로 피는 예(禮), 여러 용도로 사용되니 온몸을 다 바쳐 기여한다하여 용(用), 꽃이 많아 벌을 부르므로 덕(德), 줄기를 자르면 흰 액이 젖처럼 나오므로 자(慈), 약으로 이용하면 노인의 머리를 검게하여 효(孝), 흰 액은 모든 종기에 효험이 있어 어질 인(仁), 씨앗은 스스로의 힘으로 바람을 타고 멀리 가 새로운 후대를 만드니 용(勇)이 바로 그것이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민들레와 닮았다. 외교부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현재 7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의 국적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아픔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한민족이라는 것을 일깨워 줘야한다. 나아가 그들이 세계선교를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한국교회의 역할이다.

 

<제2회 한민족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
일시: 7월7일~11일
장소: 양재 횃불선교센터
주강사: 로렌 커닝햄(YWAM창시자), 마이클 오(국제로잔운동총재), 루이스 부시(세계변혁선교운동 국제대표), 김춘근 교수, 이재훈 목사, 김승욱 목사, 김상복 목사, 이동원 목사 등
등록: 1차 6월15일, 2차 30일.
국내참가 회비 5만원, 해외참가자는 300달러
문의: 02-570-7064 www.diaspora.co.kr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