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운 믿음의 사람들 1. 최용신 “아침공기처럼 내 마음도 새롭게 하소서”
새벽을 깨운 믿음의 사람들 1. 최용신
소설 <상록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의 새벽기도
“이 아침공기가 새로움같이 이 정신도 더욱 새롭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들려오는 거룩한 종소리같이 이 몸을 강하게 해 주시며 이 입으로 나오는 말이 모든 사람의 정신을 일깨우게 하여 주소서. 여호와여 이 몸을 주께 바치오니 이 아침공기가 신성하고 깨끗함같이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오, 주여 오늘 하루를 기쁘게 하여 주소서.”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와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 농촌의 실상도 엿볼 수 있다.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모델이 바로 최용신이다.
최용신은 크리스천이었다.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믿었다. 그가 1929년에 쓴 일기를 보면 신앙과 삶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가로 잘 알려진 최용신은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삶의 자세를 다듬었다. 그는 새벽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또 하나의 사명이 있었다. 바로 계몽운동이다.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 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그녀는 계몽운동을 통해 농촌 주민들과 어린이들에게 잃어버린 조국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불어넣었다.
항일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목숨 바치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9살이던 1916년 원산에 있는 루시여자보통학교와 루시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루시보통학교는 1903년 여자 선교사 캐롤(A. Carrol)과 놀스(Knols)에 의해 설립된 감리교 계열의 미션스쿨이다. 당시 원산 지역을 대표하는 여성교육기관이었다. 최용신은 이 학교를 1928년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그녀는 재학 당시 교목이었던 전희균 목사의 권유로 감리교 계열의 신학교에 진학했다. 협성여자신학교는 현재 감리교신학대학의 모태다.
지난 15일 최용신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안산 최용신기념관과 샘골교회에 갔다.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 상록공원, 상록초등학교…. 최용신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에는 온통 ‘상록’이 붙어 있다. 이 모든 명칭을 소설 <상록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 최용신이 한 평생 산 농촌마을 ‘샘골’이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항일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목숨을 바친 그녀의 정신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가 ‘상록’이라는 이름에 녹아 있는 것 같다.
상록수역 1번 출구에서 5분여를 걸으면 최용신기념관에 다다른다. 기념관 옆에는 샘골교회가 있다. 최용신이 한글과 산술, 노래와 성경을 가르치던 교회다.
“배워야 산다. 아는 것이 힘이다.”
기념관 앞에 적힌 글귀다. 최용신의 절박함 외침이 담겼다. 어린이들에게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야한다는 정신을 심어주고, 신앙을 가르치던 그녀의 마음이 녹아있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며 일신의 영달만 도모한다면 저 버림받은 농촌아이들의 까막눈은 누가 뜨게 해줄 것인가.”
최용신은 겨레의 살 길은 농촌계몽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1931년 대한YWCA연합회의 파송을 받아 안산 천곡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잠들어있는 민족의 힘을 깨우려고 노력했다. 낮에는 40여 명의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산수, 재봉과 수예, 성경과 노래를 가르쳤고 밤에는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불과 3개월 만에 그녀에게 배우러 온 어린이가 100명이 넘었다.
일제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경찰은 ‘학교시설이 낙후되어 붕괴될 수 있다’는 트집을 잡아 학생 수를 줄일 것을 강요했다. 그녀는 학생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 배우기 위해 1934년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는데 누적된 피로와 영양실조로 1935년 1월 23일 생애를 마감했다. 불과 26세였다.
기념관과 샘골교회 그리고 향나무
기념관 옆길을 따라 내려가면 최용신의 묘가 나온다. 그런데 무덤이 한 기가 아닌 두 기다. 무궁화가 새겨진 왼쪽 묘는 최용신의 묘이고, 십자가가 새겨진 오른쪽 묘는 그녀의 약혼자이자 신앙의 동지였던 김학준 장로의 묘다.
김학준은 최용신은 고향이 같다. 김학준이 최용신의 뒷집에 살았다. 열여섯 살에 약혼한 이들은 10년 뒤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그날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최용신이 사망했다. 부고를 들은 김학준이 한달음에 달려와 시신을 안고 통곡했다. 김학준이 1970년대에 세상을 떠나며 유언을 남겼다.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고.
김학준의 유족들은 교회에 땅 1천여 평을 기증하고, 김학준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두 사람의 묘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고 추모하고 있다.
최용신의 고귀한 생애는 소설가 심훈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1937년 기독교인이자 농학자였던 류달영이 최용신에 대한 최초의 전기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소전>을 썼다. 1964년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용신봉사상’을 제정했고, 1995년에는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최용신기념관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위치한 샘골교회에는 상록수가 심겨 있다. 최용신이 직접 심은 향나무다. 다섯 그루가 남아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모든 이들의 계몽을 위해 힘썼던 최용신은 고작 스물여섯 해를 살았다. 그녀는 가난과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농촌을 위해 한 평생을 온전히 바쳤다. 그 숭고한 정신이 최용신기념관과 샘골교회에 남아 있다. 그녀가 심은 향나무와 함께.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최용신과 김학준의 묘.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