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시편 27편 1~14/이재훈 목사
시편 27편 1~14
이재훈 목사
성도들의 삶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담대한 용기, 용기가 없으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면,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 담대한 용기가 없다면 우리가 세상에 요동치는 위협하는 모든 세상에 흐름 속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다. 시편 27편을 통해 다윗의 마음 속에서 있었던 담대한 용기, 그가 구하고 있었던 담대한 믿음의 용기를 우리 모두가 함께 성령 안에서 우리 마음에 품고 함께 체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성도들의 2가지 유형, 1. 하나님의 뜻 가운데 믿음의 삶을 살아가다가도 두려움 때문에 중간에 낙심하고 포기하게 되는 위험, 2. 처음부터 두렵고 위험해보여서 시작조차 하지 않고 피해버리는 위험. 이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서 일어난다.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담대하지 못한 믿음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버림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여러 약속들을 알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담대한 확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 8:1) 위대한 확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롬 8장 마지막 절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사망이나 기쁨이나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변치 않는)사랑에 대한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흔들리고 낙심하게 될 때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을 세상 속에 담대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분 중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주변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믿는지 모르게 예수님을 믿는 분들이 계신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두려워서라고 한다. 인기가 떨어질까봐. 더 잘 알려진 연예인은 내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알려지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떨어질까봐. 싫어할까봐. 사람들이 나를 배척할까봐. 라고 두려워서 자신의 믿음을 담대하게 고백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담대하게 선포되고 선언되고 고백되고 증거 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점점 약해지고 쇄약해지고 포기될 수 있는 믿음으로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해질 것은 우리의 믿음이 담대하고, 용기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한다. 그 믿음의 담대함을 얻게 되는 이 새벽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편 27편 다윗의 고백 속에 담대한 용기를 보면, 그는 지극히 담대함을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것은 선천적으로 심장이 강하기 때문에 담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보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강한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선천적 담대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담대함이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 분이 내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 두려움이 없다는 고백.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게 되는 이 담대함이 바로 다윗의 담대함 이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강하고 담대하라는 명령을 주신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담대함, 다윗이 가졌던 담대함, 바로 이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담대함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명령에 나타난다. (수 1:7)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했다. 강하고 담대함의 이 명령은 남자답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용기일수도 있지만, 이 담대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담대함이다. 7절에 말한다 “강하고 지극히 담대하여” 잘 싸우라는 것인가? 싸움에서 이겨야하기 때문에 담대하라는 것인가? 그런 말씀이 아니라 나의 모세가 준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말한다. 너는 담대하여 그 말씀대로 행하라. 이 세상 속에 이 말씀대로 아는 것만 행해도 우린 어쩌면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행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용기, 그 용기에 담대함이 필요한 줄로 믿는다.
두 번째 가져야 할 담대함은 (요일 5:16~15) 하나님을 향하여 가져야 될 담대함,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듣고 응답하신다는 담대함,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에 대한 담대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이 없다면 기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듣고 응답하신다는 담대한 확신, 기도에 있어서의 담대한 확신,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다윗에게 있는 담대함은 이 담대함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나온 것이다.
악한 원수들이 내게 다가와 내 살을 뜯으려 할지라도~ 오히려 그들이 넘어질 것이다. 그런 악한 원수들의 잔인한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군대가 와서 진을 치고, 전쟁이 나를 치려할지라도 얼마나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전쟁이 났다. 큰 위협이 일어났다고 할 때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전쟁과 군대가 나를 치려할 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태연하게 안연하리로다. 얼마나 큰 담대함인가? 여러분 이런 담대함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점점 쇠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담대함, 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기도했을 때 응답하신다는 담대함, 이것을 가지고 세상 속에 나갈 때 우리는 원수가 나를 치려해도 군대가 나를 치려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디서 나를 이렇게 담대하게 하는 것일까? 다윗의 고백 속에 4-6절 그 비밀이 나와 있다. 다윗에게 믿음의 담대함을 가져다준 원인이 4-6절 고백이 나와 있다. 여기서 나타난 담대함의 비밀은, 단순함에서 있다. 그것은 단순하다. 담대한 믿음은 단순함에 있다. 여기서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가장 우선적인 일이요 유일한 일이요 가장 바라는 일이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요, 다른 것들은 다 포기할지라도 결코 이 한가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내 삶을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요,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요, 내가 추구하는 이상, 비전, 꿈이요,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내가 붙잡는 그것,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그것 아니겠습니까. 단순한 것이다.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위치를 가장 두려워했고, 그것을 구하고 원했다면 그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가장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죽기밖에 더하겠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 안에서 때로는 내 생명을 잃을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단 한 가지는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며 사는 그것, 그 한 가지를 구하는 삶은 담대해지는 것이다.
왜 두려움이 많은가? 바라는 것이 많을수록 두려움이 많다. 자기가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많을수록,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많을수록 두려운 것이다. 다 포기하고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 그 한가지로 만족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것은 물리적 공간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하루 종일 예배당에 거하고 예배만 드리려고 하는 분이 있다. 그러지말아라. 집에 가서 살림도 하고 일도하고 그래야한다. 물리적 공간으로 생각해 가족도 안 보고, 일도 안하고, 수도원의 삶처럼 여호와의 아름다움만 앙망하면, 여호와의 아름다움이 안 보인다. 여기서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은 물리적 공간도 구별이 필요하다. 주변을 위해 리트릿 시간도 필요하지만, 여기서 사회와 가정과 고립된 단절된 예배당에서 수도원에서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내가 살아가는 삶, 장소에서 모두 여호와의 집이라고 생각하며 직장에서 내 마음 많은 일을 하지만 내가 바라는 한 가지는 내가 일하는 직장이 여호와의 집이 되는 것이다. 내 가정이 여호와의 집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어는 곳을 가든지 그 마음에 바라는 한 가지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삶을 통일성 있게 한 가지 움직이는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다. 저는 이것은 최경주 집사님의 간증으로 저거구나 깨달았다. 최경주 집사님의 하이라이트 어느 골프대회를 나갔는데, 아내 집사님이 주일학교 교사도 하시고 아주 열심히신 분이다. 그런데 아내 분은 골프대회를 나갈 때마다 암송카드를 하나씩 주는 것이다. 오늘 하루 이 암송을 해오는 것이다. 골프에 집중해야하는데 암송카드를 주니까 (요15장 말씀이었던 것 같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암송카드의 말씀이 계속 떠오른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생각나지 않더라. 계속 게임을 하는데 공이 어디 있는지 생각이 안 나더라. 그 다음엔 어떤 효과가 있는가. 이 공이 원하는 대로 가면 기분이 좋고, 원하는 대로 가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고 다음 구절이 뭐였지만 생각났다고 한다. 치고 항상 생각나는 것은 “이것 빨리 외워야하는데, 그래야 아내에게 야단맞지 않는데…”하며 하루종일 말씀만 묵상하고 그 다음 말씀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이 대회를 이끌고 가는 마음에 있었던 유일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만 생각하고, 온통 그 말씀이 떠나가지 않고, 그 말씀 다음에 무슨 말씀이었지. 그 단순함을 가지고 그 대회에서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다.는 간증을 했다. 물론 우리가 일을 하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며) 말씀만 암송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면에 (마음속에) 우리의 삶을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원치 않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이 지탱해주는 삶의 원리가 있어야 된다. 그것은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앙망하는 은밀한 교제와 사귐. 그런 태도가 믿음이 삶을 움직일 때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세상적으로 원하는 그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내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그 한 가지, 내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여호와의 집이 되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여호와를 바라볼 것이다. 단순한 믿음이 우리를 담대하게 한다. 단순한 믿음이 회복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주셨다. (환난 날에~ 머리를 원수 위에 들게 하시고, 즐거운 노래를~~)우리 스스로 원수를 이길 수 없다. 환난 날에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숨겨주시고 높은 바위위에 두셔야 안전할 줄로 믿는다. 내 평생에 이 한 가지를 구하겠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해두겠다. 내 모든 관심이 2, 3차적인 관심이 되어버리는 이 믿음, 여호와의 아름다움만을 앙망하는, 이것이 1차적인 목표가 될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믿음 이면에 또 하나의 믿음의 세계가 있다.
(7-9절) 이 단순한 믿음은 가난한 믿음, 가난한 마음이다. 주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질 때 나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앞의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령 안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다. “내 얼굴을 찾으라” 명령하실 때, 초청하실 때,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 다윗은 이렇게 반응한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이런 반응이 일어난다. 가난한 마음이 있지 않으면 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리우시면 우리는 찾아도 만날 수 없고,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비추어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는 이것은 초청이기도하고 허락, 명령이기도 한다. 그럴 때 다윗은 말한다 “내가 그의 얼굴을 찾겠습니다”라고 하는 즉각적이기도 하며 신속하게 곧바로 응답하는 것이다. 내가 주의 얼굴을 찾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보여주시고, 비춰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고 한 이후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라고 한다. 주의 얼굴을 숨기실 것 같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발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 계속해서 비춰주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해서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은 문자적인 얼굴이 아니라 인자하심이다. 한 사람의 인격, 태도, 그사람의 사람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얼굴이다. 뒷통수를 보고 잘 알지 못한다. 뒷모습은 다 눌려있고, 뒤는 잘.. 못 본다. 손을, 발을 보고 알 수 있겠나 그 사람의 사람 됨은 얼굴을 보고 알 수 있다. 얼굴이라는 것은 그의 존재요, 인격이요, 사람됨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서 감추지 마소서. 거두지 마소서. 그런 이 가난한 마음은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는 두려움, 그가 추구하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거하는 것이라면 그 단순한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멀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간절함 속에 가난한 믿음에서 단순함이 나오고 단순함에서 담대함이 나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9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과거형으로 되어있는데 우리말성경에서는 ‘주께서 이제껏 내 도움이 되지 않으셨나이까’ 라는 것이 그 체험 속에서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부탁할 땐, “내가 말야, 내가 이런 부탁해 본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런 부탁 않할거야. 그러니 도와줘”라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내가 이런 부탁 잘 안하는데…”라고 한다. 미안하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도 “하나님, 전에도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내가 안할텐데 이번만 들어주십시오. ”라고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정반대로..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 분이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날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나를 버리실 것입니까?”이렇게 구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앞으로도 도와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어떻게 보면 뻔뻔한데 참된 가난한 마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껏 도와주셨으니 앞으로도 도와주셔야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에서부터 오는 태도인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선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나, 우리가 하나님께 청할 것이 있다면 이전에도 들어주신 것이 있고, 앞으로도 들어주셔야한다고 기도해야한다. 다윗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나. 그가 양떼를 지킬 때, 맹수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다. 그가 골리앗을 상대할 때도 싸울 때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다. 사울의 쫓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다. 그가 믿음이 없어서 블레셋 가드 왕에게서 미친 척을 하며 지혜 없는 행동을 할 때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를 도와주셨다. 자신의 과거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습니다. 이제껏 도와주신 하나님, 앞으로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는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보면서 오늘도 해가 뜰 것이라 믿는 믿음처럼 어제까지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봐왔기 때문에 내일도 태양이 뜰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잘 안 믿는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내 삶을 도와주셨다면 앞으로도 내 삶을 도와주실 것이다.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의미이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다” 삼상 7:12 에벤에셀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가 끝이라는 얘깁니까.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란 뜻은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도우실 것이다’ 라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14절,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진정한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을 기다린다. 교만한 마음은 기다리지 못한다. 내가 구하고 또 구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때로 더디 응답하셔도 기다리는 것이다. 겸손한 마음, 가난한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이다. 왜 기다리게 하시는가? 기다림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증거되기 때문이다. 기다림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확증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분량이 점점 더 채워지는 것을 원하신다. 기다림을 통해 많은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여호와를 기다리라.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리라” 고 문자적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이런 뜻이다.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주실 것이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기다림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며 있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신비한 능력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오래 기다릴수록 담대해지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전능자의 샘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에게.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에게 그는 강하고 담대해질 것이다. 14절에서 1절로 가는 것이다. 1-3절 고백이 거기서 나온다. 다윗의 담대한 믿음은 여호와를 기다렸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담대해졌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의 나의 빛이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원수가 와도 두렵지 않고, 군대가 와도 두렵지 않다. 그 믿음은 여호와를 기다릴 때 얻어진 것이다. 그의 가난한 믿음, 여호와의 집에서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 담대한 마음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담대함이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여 나에게 담대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나에게 단순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나에게 가난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런 믿음으로 세상 속에 승리하는 믿음으로 추구하기 원한다.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