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마 10장 37~39/손동희 권사
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
마 10장 37~39
손동희 권사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은 저희 아버님의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으로 끌려 들어가실 때 저희 할아버님이 우리 아버님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손양원 목사를 향한 대역사를 이루신 것은 애양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병환자가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아버님과 나병환자들과는 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으로 이어져왔다.
그러던 어느 날, 1940.9.25. 일본 형사 두 명이 나타나 아버지의 손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끌려간 죄목은 신사참배 반대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는 천황을 우상화하는 일종의 망동이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자는 천황 신성 모독죄를 적용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네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아버지는 감옥으로 끌려 들어갔고, 나병 환자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애양원에 일본 사람인 안또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애양원에도 신사참배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만일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려면 애양원을 나가라고 다그쳤다. 그러던 그 중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7-8명 정도는 저 멀리 하동군 북방리에 위치한 산속에 움막을 쳐놓고, 이집저집 구걸을 하며 다녔다. 안토 원장이 들어와 애양원을 비우라고 독촉했다. 울며 쫓겨 나온 애양원에서 우리들은 갈 곳이 없어 부산의 산꼭대기 학고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필요한 것은 7식구 생계 문제가 가장 시급했는데, 그 때 오빠들의 나이는 큰 오빠는 18세, 작은 오빠는 13세였다. 두 오빠가 간신히 찾은 곳은 나무통 공장이었다. 통공장에 들어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생활을 유지했다. 어머님은 산으로 들로 쑥이며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이렇게 우리는 고생하고 아버지는 감옥에서 고생하셨는데 아버지로부터 가끔 오는 편지가 있다. 아버지께서 할아버님께 쓰신 편지다.
“아버님, 불효자 양원을 위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마옵소서. 한 덩어리의 주먹밥, 한 잔의 소금국은 그 진미는 천사의 떡 맛이올시다. 아버님은 엄동설한 추위를 염려하시나 들에 백합화를 곱게 피우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일하는 일군, 밥 아니 먹이겠습니까. 소자는 본래의 아니 적은 사람이니 이 밥도 만족하옵고, 키가 적은 사람이오니 이 적은 이불이 내 발등을 덮었으니 이만하면 만족이니이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이 오니, 광명은 낮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지나지 아니할 수 없고, 양 추운 가지를 위하여 엄동설한의 고생을 삼고 견디지 아니할 수 없겠지요. 고난은 참으로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찬거 견디게만 하면 이보다도 더 큰 복은 없는 법입니다. 불평이 많은 자는 천하를 다 얻어도 오히려 불평 할 것이고,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잔의 물에도 자족의 기쁨이 있으니, 그러므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근심은 만병에 근원이며 즐거움은 백병의 양약이이다. 구령위에 올라가면 피를 이루고 이슬이 맺히면 서리가 맺게 되는 것처럼 육신의 생각은 근심을 이루고, 근심이 맺히면 병이 되나니 인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더이다”
우리 할아버님은 아버님 편지만 오면 부들부들 떨었다. “우리 양원이~ 우리 양원이~”하면서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 때 우리 큰오빠, 작은 오빠가 소년 가장 이었을 때, 아버님께서 쓴 편지 한 구절만 더 읽어 드리겠다.
“사랑하는 동인에게 동인아 아버지를 생각하며 눈물로서 쓴 너의 편지, 또한 감격의 눈물로서 쓴 편지가 애동(해동?)하였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위로 할아버님, 어머님, 아래로 동생들을 거느리고 가정의 중한 책임의 연약한 어깨는 얼마나 무거우냐. 나의 간절한 부탁은 할아버지를 잘 위로하여 아버지가 못 다한 일을 너는 잘할 줄 안다. 먹고 입는 것이 귀하다하여 마음까지 잃지 않아야 하고, 음식을 잘 먹는 것보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더 낫고, 의복으로 몸을 단장하는 것 보다 선행을 옷 입듯 할지니라. 돈의 설움당하고 먹을 것이 없다하여 돈과 밥을 더 가까이 할 것이 아니라 더욱더 청렴을 따르는 것이 도인의 태도니라. 평상시에는 누가 기뻐안하겠나 고난 중에 기뻐함이 신앙생활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고 극복하라. 피하려고 애쓰는 자는 근심이 더해지고, 감수하는 자는 기쁨의 발견이 중요해지나니, 고난을 감수하니 심중이 낙원이고 만사를 극복하니 용사보다 강하구나. 비록 학교에 안다녀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느니라. 세계의 대 부흥사 무디 선생도 양화 공장 식공이었고, 웅덩이에 내다버린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으며, 나일 강물 갈대밭에 내다버린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나무통만 만드는 우리 동인이 동신이의 장래도 어떻게 될지 그 누가 알겠느냐, 그러므로 항상 근신하고 노력하여 항상 학식과 덕행에 힘쓰도록 하여라. 또한 죄를 범하지 말라. 사람의 죄를 범하는 죄의 종이 되어 일생을 고통으로 살게 되느니라. 나는 무엇보다 너희들이 행여나 죄를 범할까봐 늘 가슴에 염려된다. 행여나 마귀의 세력에 유혹될까 아버지는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나는 지금 여러 가지 수감 중에 있으나 어릴 때부터 주의하지 않았던 습관과 죄악과 싸우고 있다. 행여나 내 죄가 너희들에게 미칠까 주께 간절히 빈다. 죄는 곧 사망이니라. 싸우지 않으면 승리가 없고, 이기지 못한 자는 면류관도 없나니, 힘쓰는 자는 주께서 도와 승리하게 하신다.”
이런 저런 세월이 아버님이 감옥에 가시고, 3년이 지났다. 1943.5.17. 아버님이 그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날짜이다. 우리가 손꼽아 기다린 날이다. 이 날에 모두 광주 형무소에 마중 갔으나 아버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5월 17일에 아버님의 출소하는 날짜가 맞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출소 날에 아버님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니 아버지는 죽어야 나올 수 있음을 알고 우리는 그 때 통곡했던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 아버님이 종신형을 선고 받았는가 했냐면, 5월 17일 되기 전부터 사상을 전하는 기관에서 나와 아버님을 모셔다놓고 불교에서 스님을 모셔다가 아버지와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일본의 목사를 불러다놓고 아버님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아무리해도 아버님의 신앙을 꺾을 수 없으니 손양원 목사를 불러내놓고 “손양원 목사 나오시오. 지금 집 떠나간 지 3년째인데 얼마나 처자식들이 보고 싶었겠소. 3년 동안 많은 반성도 했을 터인데 아직도 신사참배를 못하겠소. 당신은 3년간 헛수고만 했소” 라고 하니 손목사님 “헛수고는 오히려 당신들만 했소. 내가 신사참배를 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왜 어리석게 3년이 지난 지금 하겠소. 내 신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소. 돌이킬 맘 전혀 없습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우상숭배를 하는 나라는 다 망했다. 일본도 머지않아 망한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대쪽 같은 아버지 성격이시다. 그 때 당시는 세계 2차 대전이었는데,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 속에 일본이 망한다 해놓으니 이 말에 약이 올라 다시 재판을 해서 아버님은 종신형으로 되었다. 종신형이란, 저 손양원 목사는 밖에 돌아다니면 또 다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절대로 손양원 목사를 밖에 내 보내서는 안 되겠다. 고 하며 종신형 선고를 내렸다.
아버님의 종신형 결정서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네 좋습니다. 감옥에서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이고, 밖에 나가도 예수님과 함께 살 것인데,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딘들 상관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고난을 통해서만 단련된다. 나를 감옥에 가두면 나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축복이요.”라고 했다.
아버님은 맨 처음에 감옥에 끌려 들어갔을 때 39세였다. 다섯 번의 옥 생활 중, 가장 고생했던 날은 일일이 표현할지는 모르지만, 청주 공업소에 있을 때 눈만 뜨면 전도하는 것이 아버지의 업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전도요, 자고 일어나면 또 전도라, 신고가 들어왔다. 아버님을 끌어내 독방에 가둬놓았다. 독방의 식사는 있던 식사의 반만 준다. 이것도 벌칙이다. 밥의 크기가 곶감만한 밥 덩어리와 소금국물을 준다. 죽기에도 살기에도 어중간한 밥인데 결국 영양실조가 걸렸다. 아버님의 두 눈이 점점 멀어간다. 편지를 보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글씨와도 같았다.
아버님의 청주 공업소 독방에 있으면서 영하 10도가 밑도는 곳에서 영양실조에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이 때 고생한 것은 다 말할 수 없다. 아버님이 청주 공업소에 계실 때 쓰신 시가 있다.
“빈 방을 홀로 지켜 고중을 느끼나 성삼위 함께하니 내 식구 되었구나.
갖가지 고난이야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다락에 내려갈 때 쓰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입니다.
죄악으로 얽힌 육체의 껍질을 벗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단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두 번 돌아오지 못할 세상의 고난의 맛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부귀 영화의 뒤 끝은 다시 섭섭하나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 다음 차례가 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주 안에서의 고난은 진리가 아니리요.
오 주님 나에게 있는 부모, 형제, 처자 기타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지라도
오직 당신만을 향한 신앙심만은 빼앗아가지 마옵소서.
모든 것 다 잃어버릴지라도 신앙심만 남아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보다 더 유익할 것입니다.”
큰오빠 군대 입대 명령장이 날아왔을 때, 군에 갔다가 매일 아침마다 그 시대에 따르면 신사참배를 하던 시기, 큰 오빠 군대에 관련해 얼마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금식기도 맨 마지막 날 응답을 받았는데 가정을 산산조각 흩어버리는 것만이 큰오빠의 군대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응답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 일곱식구를 각각 흩으셨는데, 할아버님부터 만주 할비네, 작은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작은 오빠는 나병환자가 있는 움막촌으로 숨어버리기로 했고, 어머니와 큰 오빠는 깊은 산골에 금식 기도실에 가기로 숨어버리기로 했고, 나와 동생은 고아원에 보내기로 했다. 우리 일곱 식구는 각각 흩어버리기로 결정했다. 내 나이는 12살, 동생은 9살이었다. 큰 오빠는 “동희야, 동정아~ 미안하다”라고 했지만 막다른 골목에 서있는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나와 동생을 태워 고아원을 향해 달렸다. 사랑하는 엄마와 작별인사를 하고 부산의 구포로 달려갔다. 구포에는 외딴 데가 있었는데 한정녀 목사님이 계셨고 저희 아버지와 동기 동창 목사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고 일제시대 신사참배로 인해 목사님들이 보름씩 한 달씩, 이 고아원에서 숨어 지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정녀 목사님에게 잘 부탁한다고 맡기고는 고아원 대문을 나선 큰 오빠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래서 저와 동생은 한 날 한 시에 고아가 되고 말았다.
얼마나 엄마, 오빠 생각하며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이 그리움도 자꾸 날로 날로 복받쳐서 그리움이 원망과 분노가 되었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길래 사랑하는 아버지는 감옥에 가셔야하며, 내 사랑하는 엄마와 오빠는 헤어져야하나 어째서 우리 부모님은 별난 예수를 믿어서 우리를 이렇게 고아가 되게 하나, 하면서 부모님을 원망하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고아원에 오고 1년이 넘었다. 고아원에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는데 큰 고목나무 밑에 돗자리를 꺼내놓더니, 20명 정도가 예배를 드렸는데 보통 때 예배와는 아주 달랐다. 아주 예배가 열광적인 예배였다. 얽히고 섥히고 울고 불며 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찬송을 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틀림없었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요란 스런 예배가 끝나자마자 한 목사님이 날 찾았다.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오늘 8월 15일 해방이란다. 너희 아버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단다. 일본이 원자탄을 맞고 손을 들었단다”라며 나를 보고 우셨다. 이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온다니 눈이 번쩍 뜨였다. 종신형을 선고받으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놀랐지만 어머님은 우리들에게 일찍이 말씀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종신형을 받은 그 날부터, 이 땅에서 잊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해방 직후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신다 하니 죽었던 사람이 산 것과 같은 역사였다. 기적이 아니고야 무슨 소리입니까. 그것은 기적이었고 하나님께서 옥중 기도를 들으셨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감격스런 날에 내 기억 속에 멀고 먼 날에 고아원에 찾아오신 아버지의 볼품없는 모습이 뼈와 가죽만 남았고 송장 같았다. 남들은 다 가정이 있어 출사 마중을 갔지만 우리는 온 가족이 흩어져 있어서 출소 마중도 가지 못해 아버지는 고아원에 찾아오셨다. 아버님은 오시자마자 우리부터 찾았다. 아버지가 나를 껴안았을 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조금 있으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셋째 아들도 같은 고아원에 살았는데 주영이 오빠가 8.15 해방이 되었다는 소릴 듣고 우리 아버님을 꽉 끌어안으면서 “목사님, 제가 주기철 목사님 아들 주영이입니다” 하면서 아버님을 보며 대성통곡을 했다. 우리 아버님이 가장 존경하던 목사님이 주기철 목사님이었고, 내가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 책을 쓰면서 (주기철 목사님에 관한) 발견한게 군데군데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 순교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저희 아버님이었다. 저희 아버님이 신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주기철 목사님이 저희 아버님보다 5살 위에 계신데 로마서 강해를 하고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 이후, 그 아들을 보니 주기철 형님이 생각났다고 한다. 부둥켜 울더니 주영이 오빠는 도끼를 꺼내더니 막 달려 고아원에서 먼 곳의 공원에서 일본인들이 신사 참배하라는 동상을 세워뒀는데 주영이 오빠는 단 한방에 우상을 때리고 달아났다. 얼마나 한이 맺었으면 이런 행동을 했겠는가.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들과도 해방될 때까지도 함께 살았다. 이제 8.15 해방을 맞이하고 오빠들은 도망칠 필요도 없고 그리운 옛 고향, 5년 만에 애양원으로 찾아갔다.
1945년 애양원에 되돌아갔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은 신사참배 때문에 학교를 못 다니고, 나이들이 차서 학교에서 안 받아 주시려던 것을 학교장에게 찾아가서 학교를 못 다닌 이유를 간신히 설명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애양원 근처에는 학교가 없어서 부득이 순천에 집을 마련해 학교를 다녀야만 했고, 어머니 아버님은 애양원에서의 두 살림이 시작되었다.
해방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된 기분은 얼마나 행복은 절정을 이루었지만 행복은 길게 지나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큰 태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 이른 아침 소풍 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서는데 큰 오빠가 나를 부르더니 과자봉지와 용돈을 더 챙겨주었다. 오빠가 세 번이나 불러 세웠다. 별 다른 할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소풍을 잘 다녀와야 해”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두 오빠와는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내가 소풍을 다녀왔을 때는 두 오빠는 시체로 변해있었다. 소풍은 애양원 근처 신성포로 갔다. 저는 그 다음날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애양원으로 향했다. 다음 다음 날 밤, 저 앞에 주록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주로 학생들이 양손에 무기를 들고 뛰어내리면서 손양원 목사 내려오라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천장에 총을 쏘기도 하고, 아버지를 방에서 찾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에 한 놈이 어머니 곁을 슬쩍 지나면서 어머니께 하는 말이 “당신 아들 어제 총살당해 다 죽었소”라고 했다. 그 말 한 마디는 동인아, 동신아의 소리를 지르며 날벼락이 왔다. 소리를 지르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놀라 애양원의 환자들이 어머님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했었다.
그 때 떠오르는 것은 아직도 소풍 나올 때 이유 없이 오빠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오빠의 예감이 아니었을까, 다시는 볼 수 없는 예감의 지시를 받고 세 번씩이나 나를 불러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눈으로 두 오빠의 생사를 확인했어야만 했다.
순천을 향해 뛰었다. 여수와 순천 사이 길은 험했다. 공산당들은 인민 공화국 만세! 라고 하며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떨면서 순천 시내에 도착했는데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시체가 산더미였고, 시체 썩는 냄새와 피 비릿내가 진동을 했고, 알몸으로 죽은 시체, 전봇대에 매달린 시체하며 불에 탄 시체,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의 비극의 현장이다. 여순사건은 제주도 4.3사건 보다 더 잘 이어져온 반란사건 중 하나다. 나는 이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1948.10.19 공산 게릴라들이 여수, 순천에 대폭동을 이루었고 참혹한 이 현장은 양민 학살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여수와 순천을 생지옥을 만들어놓고 1주일만에 끝을 냈다. 1주일이란 짧은 기간 속에 사망자수가 3500명이었다. 짧은 기간에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 두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왔는데 대답없는 공간에 핏자국이 온 마당에 깔려있었다. 나는 기겁을 했다. 두 오빠가 죽음을 예상했다. 한참 멍청하니 서있었는데 옆방에 사는 양 집사님이 하는 말이 “동희야, 동희야, 너희 두 오빠가 죽었단다. 내가 너희 두 오빠의 시체를 찾아서 딴 곳에 옮겨두었다.”나를 데리고 갔다. 양 집사님을 따라갔더니 어느 산모퉁이 가마니를 깔고 있는 두 오빠의 시체는 쓸쓸히 누워있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온 몸이 피투성이로 변해있었고 가슴과 얼굴에는 총알 자국이 나타나있었다. 두 오빠의 시체를 보며 쓰러지고 말았다. 이 때 누구를 원망하랴, 내가 원망한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밖에는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두 오빠의 시체를 붙잡으며 하늘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일이 고작 이런 것들인가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찌이럴 수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죽였어요.”라며 다시 살려내라고 얼마나 덤벼들었는지 모른다. 한 사람만 데려가도 모르겠는데 왜 둘씩이나 데려갔냐며 샅데질을 하며 하나님을 부인했다. 그 때 큰 오빠 나이는 25세, 작은 오빠는 19세였다. 짧은 인생을 허망하게 마쳤다.
두 오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1주일 쯤 지났는데 여기저기서 소문이 돌았다. 동인, 동신을 죽인이는 두 오빠의 친구인 강철민(가명)이다. 그놈은 두 오빠 친구들에게 붙들려 매를 맞아 사형선고를 받아 사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었을 때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아버지의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다. 아버지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아들을 삼으려고 했었다. 그만 나는 크게 반발했다. 극구 반대의 의사를 했더니, 아버지는 나를 안정시켰다. “동희야, 내가 지난 세월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했고, 지금까지도 너희들을 고생시켰는데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거니와 내가 이대로 그를 모른 척 할 수 없구나. 제 1계명의 하나님의 명령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똑같은 명령 아니냐. 내가 어째서 이 명령은 순종하고, 다른 명령은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안 지킬 것 같으면 내가 감옥을 살았던 것도 헛살았고, 내가 너희를 키운 것도 헛고생이다.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가 없구나”라고 단호하게 아버지는 말했다. 그 말은 통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살인자가 죽어 없어져야 만이 한이라도 풀릴 것만 같았다. 나는 발을 동동구르며 또 덤벼든다. “아버님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 놈을 아들 삼을 것 같으면 내 두 오빠를 죽인 원수가 어떻게 내 오빠가 된다 말입니까. 아버지 이렇게 까지 예수를 믿습니까. 늘 별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또 대답하셨다.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아라.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원수를 사랑하려면 아들 삼아야 되지 않겠냐” 라고 하셨다. 나는 그만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다. 아버님은 이 세상 누구의 말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하셨다. 사형 직전에 처한 그 형제를 구해내서 아들로 받아들였다.
두 오빠의 죽음 이후, 열여섯 살 때 두 오빠가 순교했고 열여덟 살에 아버님이 순교했는데 참 힘들었다. 열여섯, 열여덟 이상한 병이 왔다. 앉았다 일어서면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은 공포로 휩 쌓였다. 밤낮 오빠의 발자국 소리, 총알 날아오는 소리, 순천 시내에는 전부 오빠들이 다닌 길거리, 이리가도 저리가도 오빠가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순천에 있으면 미쳐버릴 것 같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서울에 이화여중으로 전학시키셨다. 이화여중 전학 후 3학년 말기에 6.25가 터졌다. 주일에 일어났다. 물밀 듯 선전포고도 없이 쳐내려왔다. 아버님이 계신 곳은 남쪽 끝이었는데 아버지 친구들이 피난을 가자고 몰려온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불쌍한 나병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나병환자들의 신앙을 지켜야한다고 했다. 그 때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죽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아버님 처음부터 순교를 각오하신 것 같다. 공산당들이 애양원에 쳐들어오기 1주일 전부터 애양원은 하루에 세 번씩 부흥집회가 시작되었다. 종을 쳐서 예배를 드렸고 맨 마지막 날은 나병환자들에게 금식과 철야기도를 시키셨다. 그러고 아버지의 토요일 마지막 설교는 ‘요한계시록 2:10’이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설교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말씀이었고 나병 환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기고 간 설교였다. 아버지는 이 날 순교에 대해 말씀하셨다. 첫째도 순교요, 둘째도 순교요, 셋째도 순교다. 잘살려고 노력 말고, 잘죽기를 원하라. 이것은 아버지의 생활 신조였다. 아버지는 그 때는 피신가지 않으면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나, 환자들은 배에다가 몇 번씩 태웠지만 아버지는 여러번 거절했다. 9월 13일, 아버지는 강당에서 한참 기도하는데 공산당이 들이닥쳤다. 손에 수갑을 채워 여수 감옥에 가두었다. 여수 감옥에서 김창수 학생을 만났다. 우리 작은 오빠의 class mate였다. 김창수 학생을 만났고, 현재 살아있었다. 지금도 가끔 전화했다. 자기가 끌려가서 같은 방에서 죽음 직전까지 모든 사실들을 증언해주시오 라고 해서 간증 테이프를 만들어 끌려가게 된 동기부터 탈출하기 까지 녹음테이프를 만들어서 간증했었다.
아버님을 끌려내더니 공산당들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죽치고 기도나 할 것이지 돌아다니면서 공산당을 싫어하더냐”하며 아버지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 김창수 학생도 얼마나 맞았는지, 부인과 통화를 했는데 그 때 맞았던 게 얼마나 컸는지 지금까지 자식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두들겨 팼다. 그 때 끌려간 사람은 거의 자식이 없다고 한다. 얼마나 아버님이 맞았던지 기어서 기어서 여수 감방으로 들어오셨다. 여수 감방은 제 1감방부터 제 7감방이 이었는데 아버님과 김창수 학생은 제 3감방에 있었다.
이 때 나오는 음식은 꽁보리밥 뭉친 것과 굵은 소금이었다고 한다. 이 주먹밥을 먹기 위해 쥐었다 놨다 했는데, 아버지는 맨 마지막에 주먹밥을 쥐시고는 한참 기도를 드리면 다른 사람들은 다 먹고, 아버지가 먹는 것을 보고 더 먹고 싶어 아버지를 바라볼 때 아버지는 이 밥을 반을 짤라 가장 축에 있는 사람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창수 학생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학생, 이런 곳에서는 늘 배가 고픈 법이라네.”하면서 반을 잘라주는데 염치없이 그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 먹었던 그 사랑의 주먹밥, 눈물과 함께 녹음테이프가 실려 있었다.
정원 20명이 있는 이 감방에 40-50명을 감방에 넣었으니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15일간 있었던 감방에서 누구나 말을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날 말을 하게 되면 죽도록 패게 되어있었는데 지나가는 감독에게 누군가가 앞에서 말을 하다가 들켜버렸을 때 감독이 들어오더니 고함을 치더니 아무도 안 일어섰다고 한다. 그 감독은 아무도 안 일어선다면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치겠다고 하니, 아버님이 일어섰다고 한다. 그 때 김창수 학생은 ‘손목사 죽었구나’ 했지만, 손목사의 얼굴을 씨익 쳐다보더니 그냥 웃으며 지나가더란다. 그 때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을 했는데 뒤에서 일어나니 아버님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알았다고 했고 매를 맞지 않았다고 한다. 김창수 학생의 말에 의하면 아버님은 늘 기도만 드리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그 때 끌고 온 사람이 150-200명 가량 되는데 이들을 9.28일 끌어내서 광장에 몰아넣고는 여수에 미군 폭격이 너무 심하니 폭격에 맞아죽으니, 순천으로 이동하다가 미군 폭격이 끝나면 여수로 오겠다. 한 사람 차례차례 묶어서 순천으로 향했다. 여수를 빠져나오기까지 잘 나왔는데 산 밑으로 끌고 오면서 야수처럼 변해버렸다. 자기 마음대로 놀이개 삼아 발길질을 했고, 마음껏 때렸다. 아수라장 이동현장이 되었다고 한다. 밤 10시경 유난히 달이 밝았다고 한다. 순천으로 가는데 순천은커녕 순천을 훨씬 못가 여수 미평이라는 곳에 서서 달이 밝아서 다 같이 미군 폭격을 맞기 전에 10명씩 나눠서 분대로 나눠서 가야한다고 했다. 10명씩 분대로 출발했다. 1분대 출발 후 10분쯤 지나니 고요한 밤중에 따발총 소리가 울려왔다. 2분대, 3분대 출발했다. 3분대는 김창수 학생, 4분대 학생은 저희 아버님이 있었다. 지름길로 인도한 3분대는 과수원 속으로 끌고 들어갔는데 사람 썩는 냄새가 났다고 한다. 전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김창수 학생이 앞을 보니 과수원 뒤에 무수한 숲이 우거져 있는데 빨치산들이 전부 보니 자기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것이 죽음이로구나” 하며 “내가 만일에 저 총을 맞으면 나부터 먼저 쓰러져야 겠다”고 했단다. 김창수 학생은 기적적으로 줄이 풀렸다고 한다. 여름 하복이 눈에 뛸까바 팬티바람으로 뛰었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 밑에 쓰러졌다고 했다. 김창수 학생은 기어서 자기 집 가기보단 손 목사 집에 가서 새벽녘에 문을 두드렸다. 팬티 바람으로 들어온 김창수 학생을 바라보며 아버님이 석방하리라고 낙관했다. 아버님의 구명운동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손양원 목사는 무사히 살아 돌아온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 죽인 원수를 회개시켰기 때문에 아무리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감동을 받아 손목사만은 살아 돌아온다는 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김창수 학생이 “과수원으로 가보시면 손 목사님이 순교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민평 과수원에서 아버님의 시신을 들것에 들고 찾아왔다. 애양원의 통곡 소리는 저 하늘 끝까지 들렸다. 누구보다 슬피 울었던 사람은 강철민이었다. “죽을 나를 살려두고, 가시다니요 아버지, 아버지”하며 통곡을 했다. 그는 두 오빠 대신에 상주 노릇을 했다. 보는 이마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아버님은 48세에 가셨다. 아버님 생애에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사셨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할 나이에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으로 야간학교에 다녔고 어머니와 결혼 후에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촌에 찾아와 한 평생 함께 하시다가 39세 나이에 신사참배로 감옥에 끌려가셨다. 여수 경찰소, 광주 구치소, 광주 형무소, 경성 형무소, 경주 구금소의 감옥으로 전전해 다니시다가 8.15 해방의 덕분으로 감옥에서 출하하였다. 1년동안 집회를 하셨다. 살만할 때 두 오빠의 죽음을 믿음으로 이겨내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48세 나이에 순교의 제물로 드려졌다.
저의 한 때 나이에는 아버님을 원망했었다. 왜 아버님은 자기 처자식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만을 고집했는지 하며 “우리는 어떡하라고”하며 울었었다. 아버님께 원망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우리 아버님이 이해가 갔다. 우리 할아버님이 마지막으로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10장 37~39절이었다.
이 성경 말씀을 끝까지 쥐고 있었다. 내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에 대해 부인도 했지만 나이 들고 보니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정에 점을 찍어놓고, 믿음의 표본을 보이시려고 하신 것에 대해 이제야 깨달았다. 한 시대의 역사는 어디에 진실이 있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지난날을 되돌아볼 때 그 역사의 진실을 알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믿음의 모델로 삼으셨다.
흙 속에 씨는 많은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걸리듯 두 오빠의 아버님과 많은 순교자들은 죽은게 아니라 한 알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기 까지 하나의 열매는 믿음의 표본이 되었다.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