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 시편 23편 1~23 이재훈 목사
시편 23편 1~23
이재훈 목사
시편의 수많은 시 가운데서 모든 시대, 문화, 민족을 뛰어넘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공감을 불러일으킨 시가 시편 23편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해석이 필요없을 정도로 양을 치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도 구절이 너무나 분명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은 어쩌면 설명, 해설, 설교가 필요 없을 정도로 말씀 자체를 묵상하고, 읽고, 암송함으로 의미를 되새김으로 인해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고백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다윗의 체험 때문일 것이다. 개인 사상이나, 머릿속에 맴도는 고민에서 나온 시가 아니라 문학적, 예술적인 기교로 나온 감동적인 시가 아니라,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기 때문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 역사되는 것이다.
두 가지 체험이 스며들어 있다. 목자로서의 다윗의 체험, 그는 양떼를 몰고 나가서 푸른 풀밭에 양들을 누이고, 먹이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시원한 그늘로 인도하고, 골짜기를 만나서 양떼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려고 애를 썼던 경험,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싸운 체험,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헤매며 찾았던 체험, 그는 목자로서의 체험이 그가 자신을 양으로 비유해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할 때 그것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생에 체험이다. 이 시를 쓸 무렵 인생의 황혼기를 경험하며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서 그의 인생에 푸른 풀밭에, 쉴만한 물가에서 누리는 안식과 평안함과 안전함이 있었지만 그 때도 다윗도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방황한 적도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고, 그는 많은 원수들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의 인생에 황혼기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셨고 나 자신을 양으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는 신앙고백으로 썼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체험에서 나오는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우리 마음속에 다가올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라면 나는 양이라는 고백이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 속에 우리 모두가 양이라는 고백, 내 인생이 한 마디의 양 같다는 고백과 같다. 이사야 53장에서도 우리는 다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이란 동물의 특징을 잘 설명해준다. 고집이 세고, 완고한 동물로 알려진다. 얼마나 고집이 세면 훈련이 되지 않는다. 양이 나오는 서커스 보셨나요? 양이 나오는 서커스는 보지 못했다. 그것보다 더 강한 야생동물들도 훈련을 시켜 서커스에 등장하지만 그만큼 고집이 세고, 완고하죠.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간다. 양을 그냥 내버려두면 하염없이 가는 것이다. 그 앞에 어떤 위험이 있건, 올바른 길로 가건 아니건 그냥 자기 길을 간다. 반면, 다른 야생동물들은 어떤 위험이 닥쳐오면 피하고, 자기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 생존능력이 있지만 양은 위험을 피하고 먹을 것을 되찾을 능력이 없다. 하염없이 걷다가 푸른 초장이 있는데도 광야 길로 가고 풀이 없으면 광야로 하염없이 가다가 굶어죽는 것이다. 그것이 위험하고 그리고 정말 두려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뭐가 뭔지 모르고 앞으로 가다가 쉽게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매우 의존적인 동물이다. 양은 왜 무리를 지어 다니는가? 시야가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양만 보고 쫓아가는 것이다. 터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목자들이 식사하고 있는 사이에 양 1000마리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서 450마리가 그냥 죽은 일도 있었다. 앞에 가는 양이 잘못된 낭떠러지로 가면 뒤따라오는 양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계속 가는 것이다. 앞에서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뒤따라가는 것이 양이다. 멀리 보지 못하고, 바로 앞에만 볼 수 있는 것, 아주 시력이 약한 습성이 있다. 얼마나 우리 인간과 비슷한지 모른다. 남들이 하면 다 해야 되고 뒤따라가면서 자기 스스로의 비전과 시야를 갖지 못하고 휩쓸려 가기 쉬운 군중, 대중심리에 휩쓸려가기 쉽다. 또한 두려움이 아주 많다. 쉽게 두려워한다. 얼마나 두려움이 많은지 하면 양을 마스코트로 하는 스포츠 팀이 있나? 독수리도 나오고, 다양한 동물을 형상화한 스포츠 팀은 많지만 ~sheep, ~양, 으로 한 스포츠 팀의 로고로 양을 쓰는 것은 본적이 없다. 만약에 쓰면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 정도로 두려움이 많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시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전적인 의존된 인생,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피조물 일뿐만 아니라 목자시고 우리는 양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심을 믿고 의지하며 고백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이 목자가 된다. 때론 돈이 목자가 되기도 하고, 명예, TV가 목자가 되어있다. 어느 미국의 연합감리교회의 뉴스레터지에서 나온 글이다.
“TV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이다. TV는 나의 목자니, 나의 영혼은 늘 부족함을 느끼리로다. 그것은 나를 널 쇼파에 앉게 하며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는 도다. 그것은 세상에 것들에 대한 지식을 회복시켜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도다. 그것으로 하여금 매주 예배에 빠지도록 인도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는 도다. 내가 100살까지 살지라도 TV를 늘 시청할 것은 나의 가장 가까운 동행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리를 들려주고 그림을 보여주고 나를 평안하게 만드는 도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생각들로 멀어지게 하며 나의 가족과 함께하는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 가는 도다. 정령 선하지 않은 것들이 나의 삶을 가득 채울 것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이고, 내 평생에 후회와 자책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지 않는 길이 있다. TV가 아니라 CGN TV를 보시면 된다. CGN TV는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심을 알려주는 분명한 길로 인도해주기 때문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족감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가. 사실 부족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많은 것을 가지고 이미 누리고 있는데도 부족감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 어떤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감을 느끼는 나의 자신의 마음 때문에 부족감을 느낀다. 실제 그렇게 부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불신앙은 “나는 왜 이렇게 가진게 없어. 나는 항상 부족해. 나는 왜 이럴까” 이것이 불신앙의 생각들이다. 얼마나 이러한 부족감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불신앙인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시라면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느 교회에서 처음 나온 고등학생이 시편 23편을 성경 암송을 하는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외운 후 그 다음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구절만 계속 반복하다 보니 진리가 깨달아진 것이다. 그 다음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며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라고 하며 내려갔다고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신앙에서 가장 위대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면 그 분이 푸른 풀밭과 그리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푸른 풀밭에 누인다는 것, 양은 두려움과 배고픔이 있을 때 절대 눕지 않는다고 한다. ‘양과 목자’의 저자 필립켈러는 실제 양을 치는 목자의 경험을 하고 후에 사역을 하게 된 분인데 현대판 목동의 체험을 한 시편 23편을 쓴 저자이기도 하다. 아주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스테디셀러로 유명해진 책이다. 오래 전에 읽었다. 양이 눕는 것은 만족감이 있을 때 눕는다는 것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의 금전 출납부에, 현금 잔고에 이렇게 기록해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적어라” 이 고백을 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고, 채우시고, 인도하시고, 우리를 눕게 하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누우라는 것이다.
3절에서는 분위기가 바뀐다. 푸른 풀밭에 누워있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었던 양에게 변화가 있다. 23:3_소생시키시고, 소생이 필요한 상태다. 매우 위급한 상태라는 것이다.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길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소생이 필요한 상태, 생명의 위협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필립켈러는 양의 목자 된 체험을 통해 “양을 치다보면 1마리 양이 없었다. 항상 뒤집혀있다. ‘왜 뒤집혀있는가?’ 하면 움푹 파인 곳이 있으면 땅을 보면서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걷다가 몸의 무게로 발을 헛딛고,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데굴데굴 구른다. 양들을 인도할 때 목자가 못보고 그냥 굴러가면 양이 착지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고 스스로 일어나고 싶어도 안 되기 때문에 누워있는 것이다. 양이 뒤집힌 상태는 아주 위험한 경우다. 몸이 뒤집혀 있어서 몸에 있는 가스가 올라와 죽게 되거나, 야생동물들로 인해 공격을 받게 된다. 양이 길을 잃었다는 것은 굉장히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이다. 빨리 목자가 찾아서 뒤집힌 양을 바로 세워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양을 다시 올바로 세워준다는 의미가 소생시켜준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영혼은 뒤집혀있는 양과 같다. 원수의 먹이가 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의 영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셔서 소생시켜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심으로 길을 잃어 뒤집힌 양과 같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소생시켜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다.
4절은 심각한 양의 상태를 보여준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론 목자가 지나갈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이 풀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험한 길은 양들만 보낼 리가 없다. 골짜기를 지날 때는 목자는 더 긴장하고 양을 보고하고 철저하게 양을 인도하는 것이다. 푸른 풀밭에 양들이 마음껏 거닐며 때론 사용하지 않던 지팡이와 막대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때로 그 지팡이는 양들이 골짜기의 위험한 길을 갈 때 몸을 때려서 위험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양들을 때리기도 할 것이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징계일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 아프게 때려서 그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목자가 더욱 밀착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인생에 골짜기를 만났다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푸른 풀밭에 누워있을 때보다 더욱더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 더욱더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 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막대기와 지팡이로 때리신다는 것은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금 지켜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를 왜 때리십니까, 왜 나를 아프게 하십니까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골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막대기를 갖고 때리심으로 더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보호하고 계신 것이다. 라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 골짜기를 지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은 이전보다 더욱더 함께 하신다. ‘함께 한다’는 단어가 쓰인 것은 골짜기를 지날 때 쓰였다.
우리 인생에 어둡고 힘든 골짜기, 그곳은 하나님을 더욱 더 체험할 수 있다. 별은 밤에 볼 수 있다. 우리 인생에 별이 반짝이듯이 깊은 계곡, 깊은 골짜기는 하나님을 더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의 계곡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 이 말씀을 굳게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고 계시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고난은 나를 더 큰 위험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손길이다’라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골짜기는 더 빨리 지나간다.
5절에서는 어두운 골짜기에서 돌아와 마치 파티를 여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필립켈러는 기름으로 머리에 부으셨다는 것은 목자가 하는 일의 중요함은 양의 건강을 지켜주는 것인데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 파리류의 해충류들이 양을 오염시킨다. 양은 목욕을 할 수 없다. 털이 워낙 촘촘하기 때문에. 이사야 50장에 보면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라는 표현이 나온다. 양의 목욕은 털을 정기적으로 깎는 것이다. 몸은 괜찮은데 코나 얼굴과 점막에 파리들이 알을 까놓으면, 알이 부화되어 해충들이 코를 통해 머릿속에 들어간다. 양은 괴로우니까 이상한 증상을 보이면서 죽어 가는데,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다. 파리들이 가까이오지 못하도록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목자는 기름을 발라주는 것 뿐 아니라, 넘치도록 기름을 부어준다. 넘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단지 필요를 채워 주실 뿐 아니라, 넘칠 정도로 필요를 채워주시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내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주신다. 그 앞에 원수의 목전 앞에 상을 차려주신다. 이 상은 잘해서 주는 상이 아니라, 시상식 때 받는 상이 아닌, 밥상이다. 풍성한 식탁을 나에게 차려주신다. 그 식탁은 원수의 목전에서 원수가 눈앞에 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무나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신다.
이것을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은 매일매일 인생에 우리는 원수 앞에 놓여있다. 보이지 않는 사단의 원수가 있고, 때론 보이는 원수도 있다.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베풀어주신다. 얼마나 멋진 풍경인가, 원수가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고, 미움이 차오르고, 원수 때문에 내 인생이… 원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감정과 모든 인생이 흔들린다. 하나님은 “저 원수를 신경 쓰지 마라.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저 원수를 쳐다본다. 그래도 잘 안 넘어간다. 하나님은 기름을 부어주시고,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시면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한다. 저 원수가 아무리 너를 해치려고 해도 해칠 수 없다. “내가 너를 지켜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식탁에서 식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면 원수는 어떻게 될까? 원수는 건드릴 수 없음을 안다. 결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놓여있는 식탁에 식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원수는 결코 건드릴 수 없다. 우리는 그 원수를 자꾸 신경 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경쓰지마, 나와 함께 식사하자. 신경 쓰지 말고 먹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고, 식사하시는 모습을 연상해보라. 그렇다면 원수의 목전 앞에 놓인 베풀어주시는 상이 무엇일까? 이것은 매일매일 하는 Q.T.다. 풍성한 말씀의 식탁에서 이 세상에서 원수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과 더불어 식사하는 것이다. 원수 신경쓰지 말고, 나와 함께 먼저 식사하자. 그 여유, 충만한 은혜가 날마다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목자되신 하나님과 더불어 날마다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함으로 매일매일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분이 성령의 기름으로 우리의 머리에 기름 부어주실 때 어떠한 세상의 악한 해충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내게 어떤 세상의 어떤 악한 해충이 들어왔을 때, 그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나를 살린다. 성령님, 나에게 기름 부으사 세상의 어떤 악한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해주시옵소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1절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어떻게 보면 부정적 표현이지만 5절에서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같은 의미다. 부족함이 없는 인생, 내 잔이 넘치는 인생, 왜 부족함이 없나? 하나님은 간신히 부족함이 없게 만드신 인생이 아니라, 내 잔이 차고 넘치게 하시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차고 넘치는 주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6절, 양이 목자의 인도를 따라서 여정을 다 마치고 평안히 집에 돌아와 집에 거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구절이다. 양들이 목자의 인도함을 따라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양의 보호를 받으며 우리 가운데 평안히 거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인재하심과 선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 다는 것은 추적한다, 지켜보신다, 선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나를 보호하신다는 고백 속에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아름다운 고백으로 끝나고 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인생의 모습을 보여준 것과 같다고 고백한다. 1-2절 유년기 때 부모의 안락함 속에 보호받고, 안전히 자라는 모습으로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 받는 곳에서 눕고 자는 모습을 비유한다. 3절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때론 위태한 상황 가운데 놓여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4-5절은 중년 이후에 겪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인생의 치열한 상황 속에 상처입고 어두운 골짜기로 지나는 중년의 모습과 같다. 노년의 때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평생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며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는 황혼의 아름다운 고백이기도 하다. 어찌 그것이 인생뿐일까 하루의 인생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푸른 풀밭에 충만한 인생이었다가 오전 10시가 되면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오후가 되면 사망의 골짜기 저녁이 되면 원수를 만났다가 다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심을 경험하고 그리고 잠자리를 들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는 고백으로 끝날 때도 있다. 하루의 인생길에서도 수없이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푸른 초장도 경험했다가, 쉴만한 물가, 길을 잃고 뒤집혀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소생시켜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을 경험하는 이 상황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정녕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되심을 경험하고 우리가 나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