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후쿠오카(福岡)에 울려 퍼진 복(福)된 메시지

2018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의미, 영광, 영원을 갈망한다면 예수를 믿으라!”
일본인 1,577명 참가 43명 결신, 긍정적 반응 142명 

board image2018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참가자들이 집회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기뻐했다.

 
축복의 언덕 후쿠오카(福岡)에 복(福)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지난 13~14일 아크로스후쿠오카 심포니홀에서 28번째 러브소나타가 막 올랐다. 일본인 1,577명이 참석했고, 185명(43명 결신, 142명 긍정적 반응)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러브소나타 후쿠오카는 13일 교회세미나, 가스펠나이트, 14일 CEO포럼과 러브소나타 집회로 꾸며졌다. 하카타그리스도교회에서 열린 교회세미나에서는 박종길 목사 ‘예수님이 꿈꾸시는 교회’, 정진호 장로 ‘세상을 이기는 크리스천’, 이기복 교수 ‘가정사역과 크리스천’을 주제로 강의했다. 같은 날 저녁 아크로스후쿠오카 심포니홀에서는 가스펠나이트가 개최됐다. 후쿠오카 현지 성도들과 아티스트들이 연합하고 기획한 무대를 선보였다. 
14일 닛코호텔에서 진행된 CEO포럼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정재계 리더십 163명(한국 78명, 일본 85명)이 한자리에 모여 교제했다. 이 자리에서 아키모토 요시히코 사장(주식회사 빵 요시히코)은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위해 유효기간이 길고 운반이 용이한 ‘빵통조림’을 개발했다”면서 “구멍가게도 세상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한일리더십들에게 심어주었다. 
14일 저녁에는 대망의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집회가 막 올랐다. 고세원(기독교무용), 이슬기(가야금 연주자), 송솔나무(플루트 연주자), 김영미(소프라노), 안토니오 코가(기타리스트)가 게스트로 출연해서 수준 높은 볼거리를 선사했다. 메시지는 이재훈 담임목사가 전했다. 이 목사는 “인간이 의미, 영광, 영원을 갈망하는 이유는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며 “우리에게 죽음 너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를 믿고 축복(福)의 언덕(岡)에 오르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우에하라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집회에 온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찬다”고 말했다. 친구 초대로 집회에 온 한 일본인은 “한국 봉사자들의 사랑과 목사님의 메시지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인사했다. 최혁철 형제(일본어예배)는 “일본인들의 표정이 점차 밝아지는 걸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고, 김래원 어린이(11세, 수원 온누리교회)는 “어른들 따라 봉사하는 것도, 일본 사람들을 보는 것도 즐겁고 재밌었다”고 했다. 이주연 목사(산마루교회)는 “한국과 일본이 하나 된 것은 사랑의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면서 “러브소나타를 통해 십자가 사랑의 위대함과 감격을 목도했다”고 고백했다<관련기사 8-9면>.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사미 목사가 말하는 후쿠오카의 10년 후 >
 
일본, 아시아를 넘어 세계복음화를 위하여!
board image 사미 다케시 목사(하카타그리스도교회,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실행위원장)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서 현지 교계와 목회자들은 지난 1년 8개월 동안 쉼 없이 달려왔다. 후쿠오카 실행위원회 소속 위원 20명은 교단과 교파도, 사역하고 있는 지역도 다르다. 사연도 달랐지만 오직 러브소나타 후쿠오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그 중심에 실행위원장 사미 다케시 목사(하카타그리스도교회)가 있었다. 
사미 목사는 온누리교회와 인연이 매우 깊다. 1996년 한국에서 사역했는데 그가 사역하던 교회가 바로 온누리교회다. 1년 6개월 정도 온누리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서 사역하면서 신학교를 다녔다. 
“온누리교회 일본어예배 김삼인 전도사님이 1996년 규슈대학교로 유학을 오셨었어요. 그분이 온누리교회 일본어예배 청년부 회장이었는데 저를 온누리교회와 연결해주셨어요. 20년도 지난 일인데 그때가 참 그립고 고맙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던 사미 목사의 눈빛에는 온누리교회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넘쳐났다. 사미 목사는 한국의 다른 교회에서도 일본어예배부를 섬기다 2012년 2월 하카타그리스도교회에 부임했다.  
 
“러브소나타의 은혜와 감동을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다면…”
 
후쿠오카에 온 지 2년밖에 안 된 2014년이었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러브소나타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가 야마구치현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늘 야마구치현의 복음화와 전도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고요. 마침 시모노세키에서 러브소나타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협력교회 신청을 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온누리교회가 집회를 개최한다고 해서 더욱 신뢰와 애정이 있었어요.”
버스를 대절해서 성도 40여 명과 함께 시모노세키 러브소나타 집회에 참석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후쿠오카에서도 러브소나타가 개최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됐다. 그리고 2년 뒤 정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김경훈 목사(러브소나타 본부장)와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집회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제가 그때 ‘아무거나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는데 저한테 실행위원장을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당시 제가 후쿠오카에서 사역한지 5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지역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선배 목사님들에 비해 젊었기 때문에 주저했어요. 제가 후쿠오카 교회들을 연결시키고, 하나로 연합시키는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고요.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습니다.”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몇몇 성도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 하카타그리스도교회는 10년 전 열린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때도 협력교회로 참석했었다. 사미 목사가 시무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시모노세키 러브소나타에 참석했었다. 온누리교회와 러브소나타 집회를 경험한 성도들이 많았다. 러브소나타에 대한 인상도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반대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알고 봤더니 저의 목회에 불만이 있던 분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며 반대를 하셨더라고요. 어떤 분은 ‘외부 사역도 좋지만 교회 안에도 할 일이 많고 도움 줘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서 굳이 외부로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자기 교회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어요. 다른 교회와 연합하고, 헌신과 희생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사미 목사는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솔직히 이렇게 갈등할거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러브소나타에 직접 참석해서 은혜를 받아봐야 알 것 같더라고요. 러브소나타의 은혜와 감동을 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다면 반드시 그들도 변화될 거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러브소나타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면 그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변화될 거라고 믿고 밀어붙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후쿠오카 지역 목사님들에게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사미 목사는 온누리교회와 일본 교회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사미 목사의 두 가지 소원
 
사미 목사는 러브소나타를 통해 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나는 교회와 성도들이 다른 연약한 교회를 섬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청년 부흥이었다. 
“성도들이 은혜 받는 것에만 익숙해요. 받기만 하면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다른 연약한 교회를 섬김으로써 신앙이 굳건해져야 합니다. 또한 일본 교회가 부흥하려면 청년들이 부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 교회에는 청년들이 별로 없습니다. 청년들의 부흥을 위해서는 교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연합해야 합니다. 혼자는 약하지만 함께하면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미 목사의 꿈은 실현 불가능한 게 아니다. 이미 10년 전 러브소나타 후쿠오카를 통해 후쿠오카 교계가 어느 정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10년이 지난 2018년 러브소나타를 준비하면서 이 네트워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 
“우리는 1년 8개월 동안 러브소나타를 준비했습니다. 단순히 이벤트를 준비하려면 그렇게 많은 시간과 준비를 할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관계였습니다. 서로 신뢰가 없다면 앞으로도 긴밀하게 협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실행위원 목사님 중에서 10년 전 러브소나타에 참석한 분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새로운 분들이고, 젊은 목사님들입니다. 이것은 지난 10년 동안 후쿠오카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고, 리더십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새롭게 형성된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고 싶습니다. 이번 러브소나타 후쿠오카를 준비하면서 쌓은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더욱 긴밀하게 동역하는 후쿠오카 교계를 만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미 목사가 후쿠오카 교계의 꿈과 비전을 소개했다.   
“후쿠오카는 아시아의 현관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가장 가깝고, 그만큼 열려있는 곳입니다. 앞으로 후쿠오카 교계가 지리적 장점을 살려서 아시아와 긴밀히 협력하고, 세계복음화를 이뤄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후쿠오카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와 감동을 경험하고 목도한다면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러브소나타 후쿠오카 르포>
 
후쿠오카(福岡)가 왜 축복(福)의 언덕(岡)일까? 
규슈의 경제‧문화 중심 도시, 고대 동아시아 외교 집결지
지리적‧문화적 자원 활용해서 전 세계 부흥 위한 거점으로
 
 
이보다 복(福)된 곳이 또 있을까. 규슈(일본 4대 섬 중 하나. 북쪽부터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중심 도시 후쿠오카(福岡)를 둘러본 감상이다. 후쿠오카는 ‘아시아의 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로부터 일본 국제교류의 거점이었다. 1,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대 동아시아 외교 집결지였다. 후쿠오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장악하게 만들어준 지략가 ‘구로타 요시타카’(크리스천 다이묘)가 만든 도시이다. 또한 후쿠오카는 윤동주 시인이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유구하고, 역사적이며, 한국과 일본의 슬픈 역사의 애환이 공존하는 후쿠오카를 둘러봤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딱 한 시간 십분 만에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후쿠오카는 한국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일본의 도시다. 후쿠오카 공항은 한국인과 중국인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여행 온 사람들로 붐볐다. 공항에서 벗어나 지하철을 탔다. 하카타역(후쿠오카의 옛 지명, 후쿠오카시의 가장 번화가)까지 지하철로 두 정거장, 자동차로는 20분 남짓밖에 안 걸렸다. 시내와 국제공항이 이렇게 가깝다니 참으로 부러웠다. 실제로 후쿠오카는 국제공항에서 도심까지 이동 시간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가깝다고 한다. 교통 편리성 또한 으뜸이다.  
먹거리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후쿠오카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하카타라면’뿐만 아니라 우동과 소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CNN에서 선정한 아시아 10대 포장마차 도시(일본 내 유일)로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야간 포장마차 거리가 유명하다. 또한 대한해협을 끼고 있어 수산물 어획량이 상당하다.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화이트데이를 탄생시킨 과자점이 있는 곳도 바로 후쿠오카이다. 후쿠오카는 미식가들의 천국이다. 
후쿠오카는 마츠리(축제)와 이벤트의 도시이기도 하다. 거의 매월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릴 정도로 활기찬 곳이다. 왜 후쿠오카를 규슈의 경제문화 중심 도시라고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구로다 요시타카를 만나다 
 
<고로칸 역사박물관>
 
하카타역에서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오호리공원’이 있다. 그곳에 있는 ‘고로칸 역사박물관’이 볼만 하다. 
후쿠오카는 옛부터 일본의 외교, 무역, 문화 교류의 중심 거점이었다. 헤이안 시대(794~1185년)부터 고대 동아시아 국제교류의 거점 도시로 활용됐다. 이를 증명하는 근거가 바로 고로칸 역사박물관이다. 고로칸은 외국 외교관이나 귀빈들이 묵는 영빈관(게스트하우스)이다.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에 설치됐었는데 유일하게 그 장소가 확인된 곳이 후쿠오카 고로칸이다. 문헌상으로 688년에 처음 등장했다고 하니 무려 1,400년 역사를 자랑한다. 
후쿠오카는 일본의 중심 외교센터였다.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신라에서 사절단을 파견하거나 국제 무역상과 교역물품들이 후쿠오카로 집결했다. 
고로칸 역사박물관은 광활한 터 위에 몽골의 게르처럼 덩그라니 세워져있다. 고로칸 역사박물관에는 신라 토기류도 전시되어 있었다. 1,400년 전 신라인들이 문물과 교역품을 가지고 후쿠오카를 거쳐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를 다녔을 모습이 그려졌다. 

board image<후쿠오카 성터 외곽 성루 중 하나인 '시오미야구라'>

후쿠오카의 랜드마크 ‘후쿠오카 성터’도 꽤 근사하다. 후쿠오카 성은 후쿠오카 초대 번주 ‘구로다 나가마사’가 1601년부터 7년 동안 축성한 성이다. 나가마사의 아버지이자 지금의 후쿠오카와 하카타 지명과 구획을 정립한 ‘구로다 요시타카’(구로다 칸베, 구로다 조스이)가 기독교인이었다. 
요시타카는 오사카의 크리스천 다이묘(영주)였던 다카야마 우콘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세례명 시몬). 요시타카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참모가 그였기 때문이다. 요시타카는 도요토미가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지략가였다. 도요토미가 “칸베가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한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천하를 빼앗아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전술에 능했다. 요시타카는 말년에 후쿠오카 성 외곽 망루 쪽에 은거하고 ‘조스이’(如水)라는 호를 썼는데 이는 여호수아의 영어명인 ‘조슈아’를 일본식 한자로 쓴 말이다.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혼란했던 전국시대에 재산과 지위, 가문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요시타카의 책략이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회주의적인 면모가 아쉽게도 신앙에서 드러났다. 1587년 도요토미가 바테렌(선교사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추방령을 발표했다. 다카야마 우콘은 이에 반항하다 추방되었지만, 구로다 요시타카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그의 이중적인 행동에 선교사와 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받았을 충격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후쿠오카 성은 천수각 등 주요 건물들이 소실돼 몇 개의 망루와 성벽만 남아있다. 일본 굴지의 규모를 자랑할 정도로 넓은 곳이지만 유적지라는 느낌보다 한적한 공원 같다. 
외곽 망루 쪽에 요시타카가 말년에 은거했다는 장소에 가보았다. 비석만 외로이 서 있었다. 측실도 두지 않고 검약하게 살아 존경을 받았지만 기독교 박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리어 동료를 박해한 그의 이중적인 면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즐거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고난이 닥쳤을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board image<구로다 요시타카가 말년에 은거한 곳에는 비석만이 남아 있다.>


앞으로 10년 후 후쿠오카
 
후쿠오카 성터(지하철 오호리공원역)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을 더 가면 후지사키역이 나온다. 이곳은 한국인이라면 꼭 방문하기를 권한다. 한적한 주택가 사이로 보이는 이질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이곳은 현재 후쿠오카 구치소인데 윤동주 시인이 숨진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원래 후쿠오카 형무소는 후지사키역부터 시작해서 사방으로 3만 6천 평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엄청났다고 한다. 지금은 5층 건물 한 동과 빙 두른 철조망이 다였다. 사진을 찍으려니 철조망 안쪽의 교도관의 눈빛이 왠지 삼엄했다. 결국 모퉁이를 돌아 골목끝자락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서러워졌고 무서웠다. 내가 이런데 윤동주 시인은 얼마나 억울하고 무서웠을까?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다다미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윤동주 시 ‘쉽게 씌어진 시’ 中>
 
잠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읊조리며 묵념했다. 이번에는 러브소나타가 열린 아크로스후쿠오카 심포니홀에 도착했다. 러브소나타 집회가 시작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활기찼다. 300명이 넘는 한국과 일본인 봉사자들이 환한 미소와 밝은 목소리로 행사장을 찾은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드디어 28번째 러브소나타가 막 올랐다. 이번 집회의 정점은 이재훈 담임목사의 메시지였다.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언덕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영원한 세상 그 축복의 언덕에 올라가십시오!” 
애타게 부르짖는 그 목소리에 천하보다 귀한 영혼 185명(영접 43명, 긍정적 반응 142명)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러브소나타 집회는 끝났다. 이제 후쿠오카는 재도약을 준비할 것이다. 후쿠오카의 지리적?문화적 자원을 활용해서 전 세계 부흥 위한 거점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10년 후 후쿠오카를 통해서 일본과 동아시아, 세계가 부흥할 것이 기대된다. 그 길에 한국과 온누리교회가 함께 할 것이다. 
board image<후쿠오카 형무소가 있던 곳. 현재는 후쿠오카 구치소가 있다.>


가 볼만한 기독교 유적지
 
세이난학원대학박물관


board image
크리스천 인구가 유난히 적은 일본이지만 각 지역마다 가쿠레 기리시탄(박해를 피해 크리스천임을 숨긴 은둔자들) 유적이나 유물, 순교지가 있다. 후쿠오카는 유독 기독교 유적지가 없는 지역이다. 그래도 가 볼만한 기독교 시설이 있다. 세이난학원대학박물관(후쿠오카 사와라구 니시진 3-13-1)이 바로 그곳이다. 
세이난학원은 1916년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 도저가 만든 미션스쿨이다. ‘Seinan, Be True to Christ’(세이난이여, 그리스도에 충실하라)는 건학이념에 따라 채플수업과 기독교학 수업을 필수과목으로 운영하고 있다. 
도저기념관이라는 별칭이 있는 이 박물관은 ‘성경의 계보와 기독교 발전’(고대 이스라엘 유물, 유대교 관련자료, 성경 사본), ‘일본 기독교 역사’(전래, 금교정책, 기독교 해금), 도저기념실, 채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색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미션스쿨에 기독교 박물관을 만들어서 전시 및 교육의 장으로 쓰고 있다. 
안타까운 점도 있다. 세이난학원은 신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미션스쿨이지만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세이난학원이 복음에 입각한 학교로 다시 거듭나서 예전처럼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기도가 필요하다.  
기회가 되면 세이난학원대학박물관에 들러 일본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다. 어디서나 청년이 곧 미래이기 때문이다.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