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전문가 기고 
 
‘하나님의 속삭임 한마디’를 듣는 경청(傾聽) 
 


 “혹시 여러분 중에 입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분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 귀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분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상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예쁜 입을 가진 사람이 있고, 예쁜 귀를 가진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입이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다시 말해서 언변이 좋은 사람을 칭찬한다. “어쩜 저렇게 말을 잘 할까? 나도 저렇게 말을 잘하면 참 좋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상담을 공부하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내담자에게 좋은 상담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더랬다. 초보상담자일 때는 내담자가 한참동안 고민을 털어놓고 있노라면 ‘내담자 말이 끝나고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내가 좋은 상담을 하는 걸까?’하고 고심했다. 어쩌다 좋은 해결책을 내놓거나 멋진 말을 하고나면 스스로 대견해하고 상담자로서 자질이 있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기도 했다. 좋은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서 적절한 말을 해주지 못할 때면 자괴감에 빠지게 되고, ‘내담자가 나를 무능한 상담자로 보겠지’하며 낙담하기도 했다. 상담자로서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담자들은 입이 예쁜 상담자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담을 공부하면서 상담자가 어떤 말을 얼마나 잘 하느냐보다, 내담자의 말을 얼마나 잘 들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담자들은 입이 예쁜 상담자보다 귀가 예쁜 상담자를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지만 정작 예쁜 귀를 가진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한다. 
 
경청(傾聽)의 의미
‘세 번째의 귀’로 듣는 것
 
‘예쁜 귀’라는 것은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귀가 있어도 정작 듣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가정의 저녁시간을 한번 들여다보도록 하자. 아내는 하루 종일 집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남편과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신문을 보는 남편에게 다가가 얘기 좀 하자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 남편은 신문을 보면서 말을 해보라고 대답한다. 아내가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지만 남편은 계속 신문을 보고 있다. 결국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라고 말하고, 남편은 “다 듣고 있으니까 그냥 말해”라고 대답한다. 물론 우리의 감각기관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은 눈으로는 신문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귀로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해서 더 이상 말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상담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을 한 가지 꼽으라면 아마도 ‘경청(傾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은 한마디로 내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경(傾, 기울일 경)은 그 사람을 향하는 것을 뜻한다. 경청에는 신체적으로 내담자를 향하는 주의집중행동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앞선 예에서 이야기를 듣는 남편의 태도에 아내가 불편함을 느낀 것은 주의집중행동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聽, 들을 청)이라는 글자는 耳(귀 이), 目(눈 목), 心(마음 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풀이하자면 들을 ‘청’이라는 한 글자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공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는 것은 주의집중하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몸을 기울이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눈을 맞추어 바라보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마음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처럼 경청은 신체적으로 내담자를 향하는 주의집중과 함께 내담자의 언어적 메시지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메시지까지, 그리고 명확한 메시지뿐만 아니라 불명확한 메시지도 포착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경청하기를 ‘세 번째의 귀(third ear)로 듣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의 귀는 두 개인데 세 번째 귀는 어디에 있을까? 세 번째 귀는 마음에 있다!
어느 변호사가 강연 중에 하던 말이 기억난다.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는 변호사라는 사람은 의뢰인으로부터 돈을 받아서 무기를 장착하고 콜로세움에 들어가서 사자와 호랑이와 맞서 열심히 싸워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승부사나 검투사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상대편 고소인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사건이 예상치 않게 잘 해결되는 경험을 하면서 변호사는 검투사가 아니라 동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진정한 변호사는 갑자기 휘말린 사건으로 깜깜한 동굴에 갇힌 것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안내인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그 동굴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기에 함께 도와가며 그 동굴을 지나가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말로 하면 귀로 듣고, 마음으로 얘기하면 마음으로 듣는다.”
 
귀를 누구를 향해 열어둘 것인가?
 
지금까지 경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경청의 귀를 누구를 향해 열어둘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대부분 하나님의 목소리는 소리침이 아니라 나지막한 속삭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고 또한 우리가 그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2). 
이처럼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에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사무엘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삼상 3:10). 
흔히 믿음이 커져가는 것을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깊어져가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가깝게 느끼게 되고, 그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기를 원한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때 그 세미한 음성은 내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변혁이 될 것이다. 그 속삭임을 듣고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향해서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 임하게 된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우리의 영에 감동으로 울려 퍼진다. 속삭임 한 번만으로도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그 한 번의 작은 음성만으로도 큰 사명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난다. 
그분의 음성을 매일 매순간 들을 수 있다면 바람 한 점에도, 피아노 건반의 그 울림 안에서도, 찬양의 목소리 안에서도, 지는 노을과 구름 빛 안에서도, 주님 안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마주 잡은 손과 눈빛에서도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하지만 다른 소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가 많다. 주변의 소리, 두려움의 소리, 불신의 소리, 낙담과 절망의 소리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열왕기상 19장에서 절망에 빠져서 굴 속으로 들어간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이제 그만 어두운 곳에서 나오라. 비탄, 눈물, 낙담, 절망에서 나오라”고 속삭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운 곳에서 나오기를 원하신다. 수렁에서 우리를 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속삭임이다. 지금 삶의 폭풍우와 지진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의 속삭임 한마디’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 사무엘의 귀를 달라고 기도하자.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하혜숙 교수(강동 온누리교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과)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