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 해설]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맛있는 말씀 해설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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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속담에 “Office changes manners”라는 표현이 있다. ‘지위가 매너를 바꾼다’는 뜻으로, 자리가 그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어떤 역할에 충분한 사람이어서 맡는 게 아니라 부족해도 그 자리와 역할을 감당하면서 점차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장해나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교육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ㅤ
<마태복음> 5장 13~16절의 제자들은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예수님은 그때 제자들의 모습과 상관없이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4)이라며 정체성을 부여해주셨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 존재한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법은 우리의 소금채취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13절의 ‘이 땅’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스’는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의 소금은 사해의 늪 지역에서 채취하거나 암염의 형태였다. 예수님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소금채취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신 상태에서 그들의 상황에 맞춰 ‘이 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일하시고, 우리 삶의 지경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가정, 나의 직장, 그리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일하신다.
14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예수님은 ‘세상’이라는 단어에 우주적 개념인 ‘코스모스’를 사용하셨다. 빛은 우주를 뚫고 우리에게 온다. 우주는 어떤 곳인가? 공기도, 중력도, 빛도 없는 끝없는 두려움의 공간이자 미지의 공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곳에서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 두려움의 영역이 있는가?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 있는가? 예수님은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과 빛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소금은 그 맛을 잃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 소금은 짠 맛을 낸다. 짜기 때문에 달고 맛있는 사탕이나 초콜릿처럼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는다. 그러나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소금 때문에 많은 이들의 생명이 살아난다. 구약에서 소제를 드릴 때 유일하게 가미할 수 있었던 게 소금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금은 정결함을 의미하고 구별됨을 의미한다. 비록 즐겨 찾지 않을지라도 그 본질을 잃지 않고 있어야 생명을 살리고, 거룩함을 드러낸다.
둘째, 빛은 모든 것을 밝게 비춘다. 15절에서 ‘비추다’로 사용된 헬라어 표현 ‘뤼케’는 현대에 빛의 밝기를 측정하는 단위인 ‘럭스’의 기원이다. 과거 빌 하이벨스 목사에게 두 달 밖에 살 수 없는 장애인 부모가 찾아와 “아기가 죽기 전에 우리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기도를 부탁했다. 사랑을 알려준다는 것은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주는 것이다. <말라기> 4장 2절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소금으로서의 삶, 빛으로서의 삶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에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자들로 살아야 한다.
/ 김재승 목사(수원서누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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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속담에 “Office changes manners”라는 표현이 있다. ‘지위가 매너를 바꾼다’는 뜻으로, 자리가 그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어떤 역할에 충분한 사람이어서 맡는 게 아니라 부족해도 그 자리와 역할을 감당하면서 점차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장해나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교육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ㅤ
<마태복음> 5장 13~16절의 제자들은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예수님은 그때 제자들의 모습과 상관없이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4)이라며 정체성을 부여해주셨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 존재한다.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법은 우리의 소금채취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13절의 ‘이 땅’으로 번역된 헬라어 ‘게스’는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당시 팔레스타인지역의 소금은 사해의 늪 지역에서 채취하거나 암염의 형태였다. 예수님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소금채취 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신 상태에서 그들의 상황에 맞춰 ‘이 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일하시고, 우리 삶의 지경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가정, 나의 직장, 그리고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일하신다.
14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예수님은 ‘세상’이라는 단어에 우주적 개념인 ‘코스모스’를 사용하셨다. 빛은 우주를 뚫고 우리에게 온다. 우주는 어떤 곳인가? 공기도, 중력도, 빛도 없는 끝없는 두려움의 공간이자 미지의 공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곳에서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 두려움의 영역이 있는가?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 있는가? 예수님은 바로 그곳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소금과 빛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 소금은 그 맛을 잃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 소금은 짠 맛을 낸다. 짜기 때문에 달고 맛있는 사탕이나 초콜릿처럼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는다. 그러나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소금 때문에 많은 이들의 생명이 살아난다. 구약에서 소제를 드릴 때 유일하게 가미할 수 있었던 게 소금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금은 정결함을 의미하고 구별됨을 의미한다. 비록 즐겨 찾지 않을지라도 그 본질을 잃지 않고 있어야 생명을 살리고, 거룩함을 드러낸다.
둘째, 빛은 모든 것을 밝게 비춘다. 15절에서 ‘비추다’로 사용된 헬라어 표현 ‘뤼케’는 현대에 빛의 밝기를 측정하는 단위인 ‘럭스’의 기원이다. 과거 빌 하이벨스 목사에게 두 달 밖에 살 수 없는 장애인 부모가 찾아와 “아기가 죽기 전에 우리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해 달라”며 기도를 부탁했다. 사랑을 알려준다는 것은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주는 것이다. <말라기> 4장 2절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소금으로서의 삶, 빛으로서의 삶은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에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자들로 살아야 한다.
/ 김재승 목사(수원서누리공동체)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