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고후 5:1~10
/ 이재훈 목사
성경을 통해 배우는 참된 믿음은 세상에서의 만사형통을 가져다주는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 속의 어떤 고난과 시험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매우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통해 나타난 믿음이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참된 믿음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만 보면 사도 바울은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참된 하늘의 복을 누린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바라보면 참된 믿음의 비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당하는 모든 고난을 ‘잠시 당하는 가벼운 고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현실에 늘 갇혀서 살아갑니다. 좋은 환경에서는 만족하다가 고난과 광야를 만나면 낙심합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절망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죽음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매우 중요한 통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평안한 마음과 담대한 믿음으로 해석하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머지않아 자신의 몸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징후도 나타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굶주림과 헐벗음, 때로는 채찍질과 질병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고초를 겪었기에 그의 몸에는 상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고통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무너져가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전히 교회들을 향한 자신의 소명,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자신의 부르심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으로
죽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출생보다 확실합니다. 태어날 수 있었던 많은 생명이 태어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죽음을 피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출생보다 확실합니다. 사람은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입니다. 둘째, 이 땅에서 천국처럼 살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입니다. 셋째, 이 땅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입니다. 넷째, 이 땅에서 천국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린다는 것은 문제나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시험과 고난이 있더라도 바울처럼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천국을 현실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천국은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상상 속에 존재하는 그림의 떡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적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천국을 소망할수록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삽니다. 자신만의 천국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삽니다. 로마 제국을 변화시켰던 사도들, 노예제도를 철폐시킨 영국의 복음전도자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영적지도자들, 조선 땅에 와서 구습과 악습을 철폐하고, 인권을 보호하고, 참된 자유를 얻게 해 주었던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을 천국에 고정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진정 하나님 뜻의 통로가 되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모든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고, 그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평강을 누리며 천국을 사는 사람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으로 죽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닥뜨리면 두려워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 아래서 해석하고,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언젠가 다가오게 될 죽음을 복음의 빛, 믿음의 빛, 죽음 이후 우리에게 예비된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세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장막에서 영원한 집으로
바울은 죽음을 세 가지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집’의 이미지입니다. 죽음이란 일시적인 장막에서 영원한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우리는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절).
바울의 직업은 장막을 만들어 파는 것입니다. 그의 직업은 부업입니다. 주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부업으로 장막을 만들어 팔았던 것은 당시 교회가 형성이 되지 않고, 헌금으로 사역을 지원할 수 공동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활비와 사역비를 장막을 만들어 파는 일을 통해서 조달했습니다. 바울이 취급한 장막은 보통 사람들이 가정에서 취급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가정마다 설치하는 초막, 로마 군인들의 개인 텐트 정도일 것입니다. 설치하고 철수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는 간편한 구조였을 것입니다. 장막을 철수하는 데 큰 힘이 들지 않는 것을 우리의 육체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 몸이 무너지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을 지탱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지만, 우리 몸이 무너지는데는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분명히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피조물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존재 또한 인간입니다. 우리의 몸은 언젠가 무너질 연약한 장막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온전히 입게 될 부활의 몸이 들어갈 집을 예비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이 땅에서 복을 누리기 위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의 만사형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예비된 영원한 집이 있고,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몸이 주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부활의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 우리에게 예비된 영원한 집에 대한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덧입는
두 번째는 ‘옷’의 이미지입니다. 죽음은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덧입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이 장막 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사람들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 살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고자 하는 것입니다”(2~4a).
‘덧입는다’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옷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고대 문헌에서 존재의 새로움을 표현할 때는 언제나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새로운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은 옛것이 되어 무너지지만, 새로운 몸을 덧입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2~4절에서 ‘덧입는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에 대하여 해석을 명확하게 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라는 표현이 나오고, 3절에서는 ‘벗을지라도 벗은 사람들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4절에서는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죽음 이후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기간을 ‘중간 상태’라 하는데 명확한 정리가 필요합니다. 네 가지 주장이 있는데 앞의 세 가지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네 번째가 정답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죽음은 영혼이 잠을 자는 것”입니다. 죽음에 들어가면 잠자는 상태, 무의식이나 망각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부활할 때까지 영혼의 수면 상태, 망각, 무의식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두 번째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연옥으로 간다고 주장합니다. 연옥에서 영혼이 불완전한 사람들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간지대에 있다가 천국에 갈 수도 있고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를 근거로 중세 시대 면죄부를 판매했던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즉각적으로 부활한다는 주장입니다. 죽는 즉시 육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 성경의 전체 맥락에서 해석하는 네 번째 해석이 올바릅니다. 우리가 죽은 직후 우리의 영혼은 주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됩니다. 몸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의식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무의식의 상태, 망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있기 위해서 꼭 육체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의 몸을 회복하기까지 우리는 영혼의 상태로 주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상태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 육체는 완전하고 최종적이고 영광스러운 상태로 부활의 몸을 덧입을 때까지 중간상태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 온전한 부활에 이르기까지 몸의 온전한 영광을 덧입기를 사모하며 주와 함께 거하는 상태가 중간 상태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이후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두려워합니다. 우리가 가진 의식 그대로 주와 함께 존재하고, 몸의 부활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옷을 입고, 그분으로 옷 입는다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심판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에 의해 삼켜지는 죽음
세 번째는 ‘씨앗’의 이미지입니다. 죽음이 영원한 생명에 의해 삼켜져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4절b).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되는 가장 중요하고 정확한 예가 씨앗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썩어져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가 생명에 의해 삼켜지는 죽음입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썩은 것을 보고 통곡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썩지 않는 것이 통곡할 일입니다. 씨앗이 소멸되는 것은 생명에 의해 죽음이 삼켜지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백성들의 수치와 죄를 다 씻어 내시기 위해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삼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씨앗 안에 생명을 담아두셨듯이, 썩어져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육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의 죽음은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사건입니다. 우리 몸이 무너질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과정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원한 생명의 변화를 넣어주셨습니다.
바울의 세 가지 담대함
“우리를 위해 이것을 이뤄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보증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5절.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 안에 보증이 있기에 바울에게 확신과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확신과 담대함이 있어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죽음 앞에서야 판명됩니다. 바울에게는 세 가지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첫째, 몸 안에서 믿음으로 주와 동행하는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담대합니다. 우리가 몸 안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에게서 떠나 따로 거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6~7절).
우리가 몸 안에 있을 때는 주님의 물리적인 임재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환상이나 어떠한 징조를 통하여 주께서 보여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임재로 예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몸 안에 있을 때는 믿음으로 주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영혼의 눈이기에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둘째,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8절).
‘몸을 떠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몸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몸을 떠나는 죽음이 주와 함께 거하는 상태로 들어간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무덤에 있는 성도들의 몸은 소멸되지만 그 영혼은 주와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의식을 가지고 주와 함께 거하는데 몸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도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몸 안에서 믿음으로 주 함께 있는 것이고, 죽음을 통해서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몸을 떠나면 주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온전한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있든지 몸을 떠나 있든지 주를 기쁘게 하려고 힘씁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각기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9~10절).
여러분, 어떤 상황이든지 우리의 목적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담대한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심판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구별하는 심판이 아니라 믿는 자답게 살았는지를 심판하는 보응의 심판입니다. 주께서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삶을 잘 감당했는지, 칭찬받느냐 책망받느냐의 심판입니다. 우리 몸으로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의해 구원받지 않았지만,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담대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고난 때문이 아닙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험과 고난 속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시험과 고난이 없어야 행복한 것은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시험과 고난 속에서 주를 기쁘시게 한다면 우리의 삶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잠시 텐트를 치고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편안하고 안정적인 환경에 있더라도 그것은 텐트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은 텐트일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몸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덧입기를 사모하는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비된 영원한 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삶은 여행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고, 몸 안에 있을 때 주와 함께 믿음으로 동행하고,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믿음의 축복을 누리고, 승리하며, 고난을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