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1~21
/ 이재훈 목사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며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우주의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했을 때 가톨릭교회는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졌고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20세기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책에서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순간적인 혁명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유명한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말이 오늘까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세상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에도 중심을 바로 잡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생의 중심이 우리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인생의 변화가 있음을 계시해 줍니다. 우리는 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됐습니다”(17절).
이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순간적이고 급격한 변화입니다. 마치 빛이 없었던 상황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하심으로 빛이 창조되어서 빛이 없던 시대와 빛이 존재한 이후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받아들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됩니다. 또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과 같은 변화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여인의 몸에 잉태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 같은 변화가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며, 그분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대속제물이심을 믿으면 나타나는 변화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인생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삶의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순간적이고 급격한 변화는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오랜 세월 노력하고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여정을 말합니다. 내 인생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여정이 시작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뜻합니다. 여러분, 성경 내용을 다 알아야 예수님을 믿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믿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을 창조하신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상태를 ‘옛것’이라고 표현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태를 ‘새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사회경제적이나 인종적인 구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구별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옛것과 새것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위대한 선언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를 미쳤다고 여기고,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처럼 성경의 진리와 성도들의 고백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을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믿는 건 좋은데 광신자가 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상식과 현실을 무시하고 올바른 믿음이 아닌 지나친 샤머니즘적인 모습으로 나가는 잘못된 신앙을 경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삶 자체를 미친 것이라고 평가하는 내용도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확신하고 살아간다면 누군가로부터 “혹시 너 미친 거 아니야?”라는 평가를 듣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해도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13절).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위대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자신이 변화되었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옛것은 지나고 이제 새것이 되었다는 고백을 스스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관점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임을 경험하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고 고백하며, 그 새 생명이 때로 이 세상으로부터 오해받고,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영혼의 고백을 두 가지로 고백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우리가 확신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신 것은 산 사람들로 더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4~15절).
‘강권하신다’는 표현이 핵심 단어입니다. 강권하신다는 ‘지배한다’는 의미도 있고, ‘압축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하게 하다’는 의미도 있고, ‘붙잡고 사로잡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악의 영에 사로잡히고, 악의 영에 지배를 받고, 악의 영에 의하여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사로잡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행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조절하고 있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집중해서 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선을 행하지 못할까요? 왜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할까요? 옛사람과 옛 성품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권하심이 옛사람에 묶여있던 우리를 구출해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 하나님의 뜻과 선을 행하며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강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입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나를 대신한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을 대신한 죽음은 더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었으니 곧 나를 대신해 죽으신 것이고, 나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곧 내가 죽은 것이고, 내가 죽은 것은 나의 옛사람에 대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더이상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심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더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을 이 세상의 철학과 방식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소리입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모든 세상이 존재하는데, 더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한다는 말씀을 따르겠습니까? 거부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사랑의 강권함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신 사랑이요, 나를 대신해 죽으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것이고, 내가 죽었으므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구심을 자아내는 인생이 새로운 피조물 된 인생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지배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압박해야 합니다. 이 압박은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섬김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비밀을 잘 압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줄 수 있습니다. 경험한 만큼 깨닫습니다. 사랑은 사랑 받는 자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동일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자를 대신해 죽으신 사랑의 강권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셨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
둘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새로운 피조물 됨의 의미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18~19절).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소외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관계, 분열된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원인은 인간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내었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듣지 않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깨어진 소외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해도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화목하려고 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 편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고 하면서 결국 자기중심적인 체계를 만들 뿐입니다. 종교 역시 그러한 형태입니다. 여러분, 갈등 당사자끼리 진정한 화목을 이루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반드시 제3자가 도와줘야 합니다. 더욱이 부당한 취급을 받은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가해자에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화목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역사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을 요청한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당한 취급을 받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화목의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죄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죄는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죄인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었고, 우리 안에 죄가 인격적인 나와 하나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 전반부와 21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문맥이 이어집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에게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9a, 21절).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대가를 죄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죄와 죄인을 하나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대신 짊어지게 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지식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삶과 인격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는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 있는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값을 죄가 없으신 분에게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게 여겨야 합니다. 낯설게 여겨야 합니다. “왜 그러셔야만 했습니까?” 라는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죄의 값을 묻지 않으시고 죄가 없는 분에게 나 대신 죄를 짊어지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어떠한 간격도 없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외에는 불필요한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는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화목 지수’ 평가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얼마나 화목한가, 마음의 어려움이 있거나 질문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 가장 먼저 누구에게 말하는가, 기쁜 일이 있을 때 누구와 먼저 나누고 싶은가 등의 항목을 포함하면 화목 지수가 나올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화목한지를 날마다 질문해야 합니다. 화목은 죄가 해결되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이 화목을 누리는 것을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얼마나 화목하십니까? 하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하나님 얼마나 가깝게 지내십니까? 하나님과 얼마나 동행하십니까? 이 질문을 바울의 말씀을 통해 우리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화목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반드시 직분을 받습니다. 바로 다른 이들도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절이 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해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18~20절).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자 화목하게 하는 직분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영혼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습니다. 섬김을 기뻐합니다. 나눔을 기뻐합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과 질병, 재난 속에서도 평안과 기쁨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화목하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