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주일강단 - 부활 신앙을 시험하라

부활 신앙을 시험하라
고후 13:4~5
이재훈 목사 
 
위트니(E.S.Whitney)는 “그리스도인들은 티백(tea bag)과 같다.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코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뜨거운 물과 같은 재난 속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의 모진 시험 속에서 나타난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당신들이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하라” 권면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믿음 가운데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살피고 계속해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지 못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5절). 
성경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는지를 시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지를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신 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자는 확증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모함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과연 사도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확증하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고, 대적자들에게 동조하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권면으로 반격을 합니다. 
바울에 대하여 던져진 수많은 공격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연약함 가운데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의 유일한 대답이었습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뛰어넘어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못 믿겠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만 손해일 뿐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믿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천상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세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목적
 
첫째,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로 인해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고 했습니다.  
둘째, 우리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나눠주실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이기심, 두려움, 세상적인 시각, 세상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일어난 변화는 인간으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나눠주실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나눠주시는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 일어난 부활의 생명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셋째, 우리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을 체험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 안에 있던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움직인 믿음, 사탄이 결코 무너뜨릴 수 없었던 믿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셨던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은 왜 그를 부활하게 하셨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비전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이요, 꿈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믿음이 십자가와 연합된 자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믿음이 있는지를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역사적 유물로서의 증거가 있습니다. 빈무덤이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다는 세마포도 발견되기도 합니다. 수많은 유적지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곳곳에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흔적은 땅에 있는 흔적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영향력입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나 전기 등을 통해 감동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고, 거짓 영들을 쫓고, 거짓 영에 사로잡혀 있고, 죄악의 습관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회개하게 하고, 돌이키게 하고, 경건한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온 세상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변화들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죄악에서 떠나며,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까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믿는 자들 안에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빌 3:10~11). 
사도 바울이 한 말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등을 쓴 사람입니다.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을 수 있지만,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교리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입니다.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보면 그가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고백합니다. 
미국 맨하탄에서 사역하는 팀켈러 목사님이 계십니다. 두란노에서도 여러 좋은 책들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리디머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하시고 은퇴하셨습니다. 리디머교회를 개척하기 전에는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교수셨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신학교입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신학교 교수일 때 배웠던 어느 1.5세 목사님과 제가 대화하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했습니다. 저와 대화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80퍼센트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팀 켈러 목사님이 깜짝 놀라면서 “그런가요? 저는 5%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몇 퍼센트 정도 압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초 아닙니까? 새신자반에서 다루는 주제 아닙니까? 사도 바울에게 질문했다면 몇 퍼센트라고 대답했을까요? 교리적,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체험했는지, 그것을 날마다 살고 있는지가 진짜 아는 것입니다. 정보로서 아는 것과 삶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논리적, 교리적, 지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만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신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썼지만,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알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을 날마다 시험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심을 확인하는 질문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골 3:1~2).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임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이들은 몸은 땅에 있지만 하늘에 앉히심을 받은 이들이기에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이 임했을 때 하늘에 있는,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난을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육신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말씀에 붙들려 사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요 16:23). 
‘그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제자들 안에 임하시는 날입니다. 그 이전에는 제자들이 늘 엉뚱한 대답과 질문을 했습니다. 엉뚱한 생각과 계획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제자들은 여전히 땅에 속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직접 못 들어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상태에서 말씀을 읽으면 놀랍게도 그 말씀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산상수훈 말씀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머리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삶이 그 말씀에 붙들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서는 과거의 역사나 전기가 아닙니다. 말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는 통로입니다.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과 동일한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내게 구하라.” 모든 말씀이 처음 주셨던 말씀과 동일한 효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모든 영혼들에게 지금도 역사하고 있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믿음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특징입니다.
셋째,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삶의 동기가 되는지 묻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에 모든 삶의 동기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성경책만 보고 모든 일상의 삶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모든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패션(passion)’이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번역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그 참혹한 고난을 패션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열정입니다. 어떻게 한 단어가 고난이 되기도 하고, 열정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개 비슷한 뜻의 단어로 파생됩니다. 십자가 안에서만 해석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서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삶을 열정으로 살아갑니다. 그 열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연약함으로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의 사건이 모든 삶의 패턴이고, 능력이고, 원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약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여러분의 일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4절). 
이것이 바울의 대답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시험이 우리를 약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함 속에서 도리어 체험해야 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입니다. 바울은 엄청난 시험 속에서 끊임없이 연약함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도 연약함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육체의 질병이든, 관계의 어려움이든, 가정의 문제든, 이 시대의 역사의 문제든,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재난이든 우리의 대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입니다. 어떤 시험도 우리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결심과 의지로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재난을 이기고, 아픔을 이기고, 슬픔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확증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니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를 다스리고 계시고, 
내 안에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부활 주일에 우리의 부활 신앙을 다시 한 번 시험하는 
복된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