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를 붓는 사랑
향유를 붓는 사랑
이재훈 목사
성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용조 목사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 목사님은 겉으로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죄인과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 시몬과 한 여인
바리새인 시몬은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 여인 스스로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신 구원의 축복과 감격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있던 여인은 죄를 용서받는 감격과 축복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최고의 사랑 구원의 축복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초대에 응하셨고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초대받지 않은 한 여인이 갑자기 식사자리에 들어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 광경을 본 바리새인이 속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판했습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큰 죄인인줄 알았다면 그 여인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에게 교훈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한 이유
“이 여인은 죄를 용서받았기에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 한 것뿐이다”
바리새인 시몬이 왜 예수님을 저녁식사에 초대했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면 발 씻을 물을 제공했는데 그는 예수님께 발 씻을 물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머리에 향유를 붓는 예절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초대에 응하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식사에도 응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초청한 식사자리에 가고 싶겠습니까. 겉으로 환영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환영하지 않고 다른 의도가 있는 식사 자리에 누가 앉고 싶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구보다 바리새인 시몬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니까 예수님을 초청해 자신의 입지를 높이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바리새인들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의 트집 잡을 구실을 만들고 싶었는지
순수한 사랑과 존경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주셔야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시몬의 행동
초대받지 않은 여인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보고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진짜 예언자나 선지자였다면 그 여인의 행동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그 여인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미리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행동을 허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비판과 의심, 정죄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우대하고, 존경하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나 존경이 전혀 없었습니다. 의심과 비판, 심지어 정죄까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죄는 크게 보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여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과 친한 척 하지만 마음속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없고, 진정한 신앙고백 없이 겉으로만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돌아봐야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할 정도로 예수님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없었습니다. 진정한 경배와 예배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바리새인 시몬의 모습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모든 섬김의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인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섬김의 동기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밑바탕이 될 때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 없이도 봉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동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이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을 초대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고 있는 봉사와 섬김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바리새인 시몬과 같이 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더욱 열정적이고 순수해지를 바랍니다.
순종의 능력이 부족해진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 없는 봉사는 다른 사람 앞에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공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예배는 감정만 있는 쇼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 하셨듯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끊임없이 질문해야합니다.
발을 씻기고, 향유를 부은 여인
예수님이 실패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실패 속에 머물러 있지 말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
베드로의 실패보다 사랑을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없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도 죄인임을 인정하는 한 여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입니다. 여인은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여인은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시몬은 발 씻을 물을 내어주지 않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씻겼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시몬은 겉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심하고 비판했습니다. 여인은 최고의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예수님이 막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 고귀한 가치를 주신 예수님
여인의 행동을 보십시오.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어와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카락을 푸는 행동을 정숙하지 않은 행동으로 봅니다. 여인은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이 어떤 관계 길래 이런 행동을 하는지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막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40절).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 예수님이 진짜 예언자라면 이 여인의 행동을 받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마음을 아시고 질문하셨습니다.
“어떤 채권자에게 빚을 진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또 한 사람은 50 데나리온을 빚졌다. 두 사람 다 빚 갚을 돈이 없어 채권자가 두 사람의 빚을 모두 없애 주었다. 그러면 두 사람 중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여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감격으로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이 여인이 나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47절).
예수님이 여인의 행동을 막지 않고 받아주셨을 때 가치가 교환되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평가를 받던 여인을 예수님이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고귀한 가치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가치를 만든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 거기에서 가치가 생겨납니다. 어떤 것들은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을 받지만, 어떤 것들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인생이었는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가치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다니는 인형이 있습니다. 이사 갈 때도 가지고 가고, 여행갈 때고 가지고 갑니다. 그 인형을 돈으로 환산하면 가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자아이들에게 그 인형은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가치 없이는 인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가치 없게 보더라도 하나님은 가치 있게 보십니다. 사람들에게 없는 사랑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는 모두 가치가 있습니다.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치 있는 것만 사랑하게 됩니다. 가치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가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하고, 가치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것도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이 가치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
마가복음 1장에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쳐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당시에는 문둥병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문둥병자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는 예수님이 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을까요. 문둥병자들이 받은 세상의 평가를 끌어안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될 정도입니다. 우리가 가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어떻게 붙은 가격표입니까. 우리의 직업 때문에 생긴 가치입니까. 우리가 가진 재물 때문에 생긴 가치입니까. 외모나 건강 때문에 생긴 가치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매겨진 가치입니다. 그 가치가 우리를 살렸습니다.
최고의 가치 ‘예수님의 사랑’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사람들에게 버려졌지만 예수님이 그 여인의 사랑을 받아주셨습니다.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기에 그 여인이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옥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계산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로잡히는 것이고, 휩싸이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빠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말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사랑에 휩싸였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랍니다. 살아있는 생명과 같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랑은 생명처럼 자라나는 것입니다.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랑은 또 불과도 같습니다. 어떤 때는 사랑의 열기가 약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거세게 일어나 강렬한 열기를 뿜어 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여름을 맞기도 하고 겨울을 맞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밀물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썰물처럼 빠져 나가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그라지고 있습니까.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도 큰 사랑이 있고, 작은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그 밖의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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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