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이재훈 목사
사람들은 기적을 잘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잘 믿지 않는 이유는 기적이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은 믿을 수 있지만 기적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적 기사들 때문에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기적,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의 기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기적,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등이 바로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 기적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적만을 바라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기적은 결코 자연법칙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기적과 자연은 모두 하나님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으로 만물을 다스리기도 하고, 기적을 일으켜 세상을 다스리기도 합니다. 기적은 자연법칙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자연법칙 깨뜨리지 않는 기적

C.S 루이스는 <기적>이라는 책에서 기적을 ‘패턴 속으로 새로운 사건을 들여오는 예술’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깨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기적은 자연과 하나 되고 흡수됩니다. CS루이스는 기적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눴습니다.
첫째, 옛 창조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신 자연의 방식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떠올려보십시오. 예수님은 돌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옛 창조의 질서를 존중한 것입니다. 몸이 치유되는 것도 옛 창조의 기적에 속합니다. 몸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의술과 약이 치료를 돕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상처는 몸이 스스로 치료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기적은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빨리 회복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빵과 물고기의 양을 늘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돌을 빵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기존에 있는 빵을 가지고 빵으로 만드셨고, 있는 물고기를 가지고 또 다른 물고기를 만들었습니다. 옛 창조의 질서는 자연법칙대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제자들이 함께 일으킨 기적

둘째, 새 창조의 기적입니다. 새 창조의 기적은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을 통하지 않고 일으키신 기적을 말합니다. 동정녀의 탄생은 한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유일한 사람을 창조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새 창조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 부활하신 것 그리고 승천하신 것은 새 창조의 기적입니다.
저는 기적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직접 일으킨 기적과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일으킨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이 홀로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일으켰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내쫓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여해주신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치는 기적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을 신뢰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흥분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벳세다에 몰려든 사람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벳세다’라는 지역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흥분에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수양회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 속에서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홀로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주목을 받자 그들이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빈들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를 알고 그곳으로 몰려 왔습니다.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해가 질 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배가 고플 시간입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의했습니다.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우리가 외딴 곳에 와 있으니 사람들을 보내 주변 마을과 농가로 가서 잠잘 곳을 찾고 먹을 것을 얻게 하십시오’”(12절).
제자들의 건의는 매우 합리적이고 상식적입니다. 각자 흩어져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매우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저희가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가서 먹을 것을 사 와야 합니다’”(13절).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감 없어 보입니다. 헬라어는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를 앞에 씁니다. 어법과 상관없습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면서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공급과 임재하심을 의지하며 사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셔놓고 이제 와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니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현실을 모르고 말씀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분명 예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제자들이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프리카에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북녘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을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주라.

말씀 우선, 다음 계산

제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때의 상황이 요한복음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주목하시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로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께서는 빌립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이렇게 질문하신 것일 뿐, 사실 자기가 하실 일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요6:5~6절).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대화들이 다른 세 개의 복음서에는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종합해서 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끼리 먹을 것이 있는지를 찾고 있는 중에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디에서 먹을 것을 사야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질문한 이유는 벳세다가 빌립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립의 마음속에 의심과 반발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질문한 초점은 ‘어디에서’입니다. 그런데 빌립을 대답을 보십시오.
“”빌립이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한 사람당 조금씩만 먹는다고 해도 200데나리온 어치로의 빵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요 6:7).
빌립의 대답은 동문서답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를 묻고 있는데 빌립의 대답은 ‘어떻게’입니다. 빌립은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돈이 얼마가 들지를 계산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자체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질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없습니다. 그가 현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산술적인 계산이 앞서야 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이 계산입니다. 계산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계산이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자신의 계산에 예수님의 능력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50명씩 둘러앉히는 예수님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에 예수님의 능력을 포함시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때 안드레가 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먹을 것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셨기에 안드레가 열심히 찾아 온 것입니다. 그때 오병이어를 안드레가 발견했고 그것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의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정말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먹을 것이 오병이어 밖에 없었을까. 더 많은 음식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놓지 않은 것입니다. 한 소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았습니다. 순수한 반응입니다.
“제자들 중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말했습니다. ‘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소용이 있겠습니까?” (8~9절).
얼마나 소용이 있겠냐는 표현이 아쉽지만 예수님이 일하시도록 자원을 내어드린 것은 믿음의 귀한 모범입니다.
“그곳에는 남자만 5,000명 정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50명씩 둘러앉게 하라.’ 제자들은 그대로 사람들을 모두 앉혔습니다”(14~15절).
예수님이 사람들을 50명씩 둘러앉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자신감 넘치는 말씀입니까. 50명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볼 수 있는 규모입니다. 기적이 조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 때도 종들에게 물을 떠다 주라고 했습니다. 물을 떠 온 하인을 증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기적을 만드는 감사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 앞에 갖다 놓게 했습니다”(16절).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은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감사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고백입니다.
혹시 어려운 현실 속에 있습니까. 감사로 나가십시오.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다는 것을 기대하십시오. 감사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감사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상황이 변화되고, 문이 열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먹이신 기적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구약의 엘리사도 동일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입니다.

굶주린 자와 배부른 자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계산하던 빌립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빌립은 사람들이 조금씩 먹는다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이 넘게 든다고 계산했습니다. 6개월 이상의 월급이 필요하다고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보니 12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17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이 없도록 주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말씀은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의 뜻과 맞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 남은 것을 주워 담는 것은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열두 광주리나 되는 분량을 주어 담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병이어 기적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은 자연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것은 단순히 절제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배부른 자들에게 닥칠 영적 위험을 아셨습니다.
굶주린 자들에게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어렵지만, 배부른 사람에게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 들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배부른 사람들에게 절제를 가르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배부른 자들에게는 절제하게 하시고,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적을

“내가 광야에서, 그 가뭄의 땅에서 너를 알았다. 내가 그들을 먹이자 배가 불렀고 그들이 배가 부르자 교만해졌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잊어버렸다”(호13장 5~6절).
배부름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입니다. 그런데 배부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영적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위험을 경계하시기 위해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했습니다. 오병이어로 만든 빵은 자연법칙에 따라 썩어지는 빵입니다. 썩지 않는 기적의 빵이 아닙니다. 그것을 주어 담게 함으로 절약하고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과 버리는 것 없게 하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예수님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지켜야 합니다. 기적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적 이후에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기적을 일으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으키고자 하는 기적은 먹게 되고, 회복되고, 치유되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우리가 가진 자원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십시오. 버려지는 것 없도록 절약하고 절제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먹고, 회복되고, 치유되고, 구원받는 것이 기적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도록 우리가 가진 자원을 내어드리십시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