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입니까?
제자입니까?
이재훈 목사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험한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신약에 ‘제자’라는 단어가 269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세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고,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철학교수이자 훌륭한 영성가 달라스 윌라드가 쓴 <잊혀진 제자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영어제목은 ‘The great omission’입니다. 그가 책 제목을 저렇게 지은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중대한 무엇인가를 빠뜨리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중대하게 빠뜨리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 삼는 것과 제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빠뜨리고 지상명령만 수행하려고 한다고 해서 책 제목을 ‘commission’의 ‘c’를 빼고 ‘The great omission’이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목사가 쓴 <팬인가 제자인가>의 영어제목은 ‘Not a fan’입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은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지만 제자는 지극히 적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든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소수의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수많은 무리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중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예수님께 헌신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따르는 까닭은 표적을 보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팬이 되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평생 배고프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씀 때문에 예수의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요 6:65~66).
예수님은 자신에게 몰려든 수많은 무리들에게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엄격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예수님의 팬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인가’에 대해 질문해야합니다.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활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좌절과 절망을 겪으면서 마음의 평안과 쉼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거듭된 실패를 경험하면서 참된 성공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거절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동기가 옳지 않을지라도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르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이유에만 머물러 있으면 중대한 것을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깨닫고 순종하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못했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지 못했던 첫 번째 부류는 이미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진했던 사람들이고,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도 따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제자로 부름을 받아 제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제자로서의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묵으실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마리아 지역에 돌어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을 배척했습니다. 상처와 반목 때문이었습니다.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가 사마리아 지역을 침공했을 때 그들은 사민정책을 펼쳤습니다. 사민정책은 피를 섞어 혼혈민족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통성을 없애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민족이 되었습니다.
남쪽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이방민족으로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민족을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오랜 역사적 반목입니다. 한 혈통이지만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서로 상종하지 않는 지역감정이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배척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배척하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할까요?”
예수님께 충성하는 마음은 이해되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 지나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면 인정하고, 배척하면 멸망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보복해야한다는 ‘정복주의’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예수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이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뒤돌아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53~55절).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늘 존재했던 ‘정복주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가지면 보복하고 징벌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과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핍박과 전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모두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십자군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2세가 대성당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슬람교도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모스크를 세우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더 이상 그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들을 정복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교회가 환영받지 못하고, 교회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핍박하려는 움직임에 똑같이 대응하고 싸운다면 예수님이 꾸짖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온유와 인내, 겸손과 회개, 사랑과 자비, 긍휼과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사마리아인들도 구원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은총을 받아야하는 존재이지 멸망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멸망 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처럼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야합니다.
맹목적 신앙에 빠진 사람들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구나’”(57~58절).
이 사람들은 자진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삶고 있는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하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맹목적 신앙 또는 맹목주의’라고 말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아이돌을 보고 열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오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어디든,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과신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존라인이라는 청교도가 “교회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좋은 의도를 가진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맹목적으로 따르겠다는 그들의 모습을 웅변해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대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중 어떤 사람이 탑을 세우려 한다고 하자. 그러면 먼저 자리에 앉아 완공할 때까지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지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눅 14:27~28).
탑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 비용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했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대가를 계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과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대가가 있습니다. 선물 받은 자로써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장 심하게 방해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즐거움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합당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포기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을 대가로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대가들이 우리를 더 풍성하고, 영광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대가가 아닙니다. 당연히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기록에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냥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맹목적인 제자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명목상의 신앙인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따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제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사람들에게 죽은 자를 묻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 또 다른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여, 저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먼저 가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못하다’” (59~62절).
이게 웬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것까지 막는 그런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인 분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이 사람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로 장례가 났다면 그는 지금 여기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장례를 치러야 하는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부류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족들과 인사하겠다는 것을 막으실 분입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의 속마음을 보셨습니다. 이 사람은 가족들에게 허락과 이해를 받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속마음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유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두 사람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았으면 앞으로 나가야 밭이 갈립니다. 그런데 쟁기를 잡고 뒤를 보고 있다는 것은 밭을 갈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밭을 갈고 싶은 농부는 쟁기를 잡고 앞을 향하지만 밭을 갈고 싶지 않은 농부는 뒤돌아섭니다.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따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형을 ‘명목상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하지만’입니다.
참된 제자로 살아가기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긴박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긴박한 제자도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결코 물러설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긴박한 순종말입니다.
에이든 토저 목사님은 이 시대에 교회 안에 생겨난 확연한 이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단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인간들이 구세주가 필요해서 그리스도를 자진해서 영접할 수는 있으나, 그분을 주님으로 삼아 제자로 순종하는 삶은 우리가 원할 때까지 미룰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 널리 용인되고 있는 이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단도 직시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팬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모여야 합니다. 잘못된 종교적 교만과 세상을 정복하려는 잘못된 태도를 버려야합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맹목적 태도도 내려놓아야합니다. 하나님 나라 보다 먼저 세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태도도 내려놓아야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요, 구세주요, 스승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변명과 교만, 과신과 무지, 연약함이 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 원하지만 제자로 살기는 거절하는
완악한 마음, 교만한 마음, 무지한 마음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예수님이 주님이요, 구세주요, 스승이라고 고백하십시오.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