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꼭 필요한 한 가지

꼭 필요한 한 가지
누가복음 10장 38~42절
이재훈 목사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일이 정반대의 상황과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어느 순간 사랑은 온데간데없고 미움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쁨으로 시작한 일이 불평과 원망만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시작한 일이 원망과 아픔을 남기고, 심지어 다툼까지 일어나는 경우를 보면 의도가 좋다고 모든 일의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의도일수록 과정과 방법, 태도가 선해야합니다. 그래야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오늘 본문은 의도와 결과가 다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주는 말씀입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이 유명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갈등을 잘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떤 태도로 예수님을 섬기고 봉사해야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매들입니다. 두 자매 모두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을 때도 두 자매는 예수님을 진실로 경외했고, 사랑했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두 자매의 성격과 기질이 정반대입니다.
마르다는 주도적이고 열정적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때로는 자기주장이 강해 보이는 외향적인 성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정반대입니다. 조용하고 사색적이고 내성적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 내향적인 성격입니다.
마르다의 외향적인 성격은 예수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오는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한 마을에 이르시니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를 집으로 모셨습니다”(38절).
예수님 일행을 집으로 모셔 온 사람은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를 나쁜 관점으로 보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도적인 성격을 나쁜 것으로 보기 쉬운 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격과 기질은 차이가 있는 것이지,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두가 조용하고, 사색적이고, 내면적이라면 누가 세상을 움직이겠습니까.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오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외향적이고 주도적인 마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마르다는 틈만 나면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배고픈 장정 열세 명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르다는 그들을 섬기는 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르다의 장점입니다. 외향적이고 주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모셔 와 최고의 대접을 하고 싶었습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최고의 음식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마르다는 모든 일을 씩씩하게 잘해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인사를 하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갔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도중에 마리아가 떠올랐습니다. 일을 도와달라고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르다가 일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마리아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르다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남자들 속에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은 문화적으로 맞지 않는 일입니다. 부엌에 있어야 할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 듣는 마리아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마르다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매서운 눈초리로 마리아를 째려봐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르다는 분위기를 깨뜨려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 대한 섭섭함과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그때도 마라아는 마르다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마리다와 예수님은 오늘 처음 만난 것이 아닙니다. 몇 차례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주여, 제 동생이 저한테만 일을 떠맡겼는데 왜 신경도 안 쓰십니까?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40절).
마르다는 무엇인가 억울한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와달라고 말씀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억울함은 주부들이 느끼는 억울함입니다. 명절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공감이 될 것입니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는데 다른 가족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깁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한테만 일을 맡기면 원망과 분노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정신이 없구나.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것을 선택했으니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예수님의 대답은 마르다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닙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어서 언니를 도와달라고 하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의 기대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히려 마르다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신 것은 아주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성실하게 준비하는 행위를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접하려는 마음, 섬기려는 마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마르다의 문제를 지적했을까요. 예수님이 마르다를 제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되는 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르다를 더욱 성숙한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서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행동을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섬김을  기뻐하셨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마음과 태도가 옳아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마르다에게 권면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어서

마르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섬기면서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동기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로 인해 마음이 분주해진 것입니다. 마음이 분주해지면 목적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시작했지만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섬기는 사람들에 있어서 분주함은 헌신의 표시가 아니라, 배신의 표시라고 하셨습니다. 섬기면서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면서 마음이 분주해지는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일을 하고, 많이 하려고 하기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진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지나친 분주함은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일이 많은 것과 분주한 것은 다릅니다. 일이 많아도 분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이 적어도 분주할 수 있습니다. 일이 적은데 왜 분주할까요. 왜 정신이 없는 걸까요.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기 때문에

둘째,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분주한 것이 아니라, 게으르기 때문에 분주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있어서 게으르면 불필요한 것들이 삶을 채웁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삶을 뒤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꼭 해야 될 일에 집중하면 부지런해집니다. 본질적인 일에 게으르면 본질적이지 않은 일이 삶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게으르면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분명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일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의 마음을 지적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에는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여러분, 염려는 불신의 증거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300번 이상 등장합니다. 염려는 영적인 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를 하찮게 생각합니다. 염려의 뿌리는 불신이요, 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이 쓴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보면 염려에 대한 문장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염려하고 조바심을 내는 것은 결국 죄로 연결된다. 우리는 작은 걱정과 염려가 얼마나 우리가 지혜로운지를 나타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 지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염려하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찾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염려하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 모든 염려와 조바심은 하나님 없이 상황을 개선할 때 생겨난다. 염려는 하나님을 배제하고 상황을 생각할 때 일어남으로 염려는 죄악이다. 죄를 범하는 것이다.’
관심과 염려는 다릅니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과 집착도 다릅니다. 집중은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방심하고 생각이 분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 생각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관심은 하나님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만 염려는 자기 자신이나 사람에게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불필요한 일들로 인해 염려가 가득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할까 등에 대한 생각들로 인해 염려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난 것입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

잘못된 마음의 결과가 원망과 불평을 낳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에 대한 분노와 불평, 또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짐을 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짊어질 필요가 없는 짐을 스스로 지면 분노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짊어지지 않아도 될 짐을 혼자 지면 마음에 분노와 원망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절대 헌신이 아닙니다. 배신입니다. 서로의 짐을 나누고, 함께 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과도하게 지거나, 정말 중요한 일은 하지 않고 불필요한 일을 하면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 분주함과 염려가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문제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예수님 임재 앞에 머물러 있어야한다는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뀌어지면 나머지도 잘못 뀌어집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섬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 이전에 꼭 필요한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지적하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묵상, 마르다의 열정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섬기고, 일하고,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보다 우선되어야하는 것은 주님 앞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17세기 중반에 니콜라스 허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군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군인 밑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666년에 파리의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되어서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요리하는 요리사로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수도사들의 구두를 고쳐주는 일을 했습니다. 80세까지 일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에서 받은 이름이 브라더 로렌스입니다.
그분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남긴 편지와 글들이 모여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베스트셀러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책에는 스펙터클한 사건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르다가 놓쳤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엌에서, 다른 사람의 신발을 고쳐주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가 어떤 고백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인하여 후라이팬의 조그만 오믈렛을 뒤집었다. 그 일이 끝나고 달리 할이 없을 때는 바닥에 엎드려 그 오믈렛을 만드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리고 나는 왕보다 더 행복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아무도 일도 없었을 때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인하여 지푸라기 하나만을 들어도 좋았다.’
그는 후라이팬을 뒤집으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마르다는 후라이팬을 뒤집으면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모두가 귀찮아하고 하기 싫어하고 부엌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꼭 필요한 한 가지를 하면서 섬겼습니다. 마르다가 놓쳤던 꼭 필요한 한 가지부터 섬김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마음에 평안과 기쁨, 감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는 섬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역이전에 반드시 예배가 있어야 하고, 헌신 이전에 묵상이 있어야 합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섬김과 헌신, 봉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다른 극단입니다.
여러분, 마르다의 섬김 속에서 빠진 것을 우리는 채워야 합니다. 또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듣는 것은 잘하면서 부엌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잘 못하면 안 됩니다. 균형이 중요합니다. 마리아처럼 묵상하고,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동시에, 마르다처럼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면은 마리아로 가득하고, 외면은 마르다로 가득할 때 신앙이 균형을 잡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무는 동시에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배가 끊이지 않는 동시에 섬김도 가득해야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마리아처럼 묵상하고, 마르다처럼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무는 동시에 섬기십시오.

작성자  김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