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지갑의 회심
돈지갑의 회심
누가복음 12장 13~21절
이재훈 목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세 가지 회심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의 회심, 두 번째는 정신의 회심, 세 번째는 돈지갑의 회심입니다. 돈을 다루는 생활까지 회심해야 진정한 회심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을 찾아온 젊은 부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에게 “너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부자는 근심하다 돌아갔습니다. 젊은 부자는 나름대로 경건을 추구했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주님이 제시한 높은 장벽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젊은 부자에게 소유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젊은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자신을 배척했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젊은 부자에게 모든 소유를 팔라고 하셨을까요. 젊은 부자에게는 돈이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돈을 내려놓지 않는 이상 젊은 부자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하게 재물을 모은 삭개오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게오에게는 “네 집에 머무르고 싶다”며 교제를 요청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삭개오는 돈이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좌절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교제를 요청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과 함께 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세리서장으로 지내온 시절을 보면 토색한 사람들에게 네 배를 갚으면 그는 완전히 파산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젊은 부자에게 요구하셨던 일이 삭개오에게 일어났습니다.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모든 소유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이미 돈을 우상으로 삼았을 때 느꼈던 좌절과 외로움, 아픔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돈에 관한 교훈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바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돈에 관한 구절은 믿음과 기도에 관한 구절을 합친 것보다 두 배나 많습니다. 2,350구절 정도가 돈에 관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돈에 붙잡혀 살고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돈의 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한쪽을 무시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돈이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은 아랍어로 ‘맘몬’입니다. 맘몬은 재물이나 돈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맘몬은 돈을 의인화한 독특한 단어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고, 돈이 신이 되어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맘몬이라는 단어에는 ‘맡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맡기는 것이었던 돈이 이제는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돈이 하나님과 대등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
여러분, 돈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가려 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 자체를 악하게 봅니다. 부유한 것을 죄로 여깁니다. 반대로 가난한 것을 경건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주의 신앙입니다. 이것을 가난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불교권이나 힌두교권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세계관입니다. 그들은 소유하는 것 자체를 죄로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가난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불교권이나 힌두교권의 가난한 국가가 밀집한 것도 바로 이런 세계관과 철학 때문입니다. 그곳에도 부유층이 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빈부차이로 국가의 부패를 알지 못합니다. 백성들이 가난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세계관이나 철학이 바뀌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동시에 가난을 죄로 여깁니다. 이것을 번영신학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서 자라난 신학입니다. 가난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난을 피하는 것이 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물질만능주의를 만들어냅니다. 마틴 루터는 이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술 취한 사람이 말을 타다가 한번은 왼쪽으로 떨어지고, 또 한번은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생각모두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은 돈이 많거나 가난한 것을 죄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돈을 사랑하는 것을 죄의 원인으로 봅니다.
탐심, 죄를 낳는 죄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다. 돈을 사모하는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렀다”(딤전 6:10).
여러분, 부유한 사람이 돈을 더 사랑합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이 돈을 더 사랑합니까? 부유한 사람이라도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이라도 돈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유한 사람일수록 돈을 사랑할 수 있고, 가난해도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유함이나 가난이 돈을 더 사랑하는 원인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돈을 더 사랑하는 원인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재물에 대해 주시는 교훈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형제에게 유산을 저와 나누라고 말씀해 주십시오’”(13절).
유산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유산문제는 가정의 중요한 다툼 원인입니다. 구약의 율법대로라면 장남에게 3분의 2를 주고, 나머지 자녀들에게는 3분의 1을 주면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동생이 자신이 받을 유산 3분의 1을 다 받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형보다 유산을 더 많이 받고 싶어서 갈등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 동생의 요구가 탐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조심해서 모든 탐욕을 삼가라! 사람의 생명이 그 재산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14~15절).
이 사람의 마음속에 탐심이 가득합니다. 탐심은 영어로 ‘mother sin’입니다. 모태의 죄라는 의미입니다. 죄를 낳는 죄라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탐심이 가득한 어느 지독한 구두쇠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어지간히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을 만큼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선생님이 할아버지께 물었습니다.
“할아버님 어디가 아프셔서 병원에 오셨습니까?”
할아버지가 눈빛이 반짝거리면서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진료비 안 받으면 가르쳐주지”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어리석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도 이 할아버지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사람은 성공적인 부자이고 농부입니다. 16절에 보면 이 부자의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곡식이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소출이 풍성하자 창고를 확장하기로 했습니다. 풍성한 소출이 있다는 것은 농사를 잘 짓는 성공적인 농부라는 의미이고, 풍성한 소출을 저장하기 위해 창고를 확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농부를 어리석다고 했을까요. 창고를 더 크게 짓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9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 농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곡식을 저장했습니다, 목적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는 목적에서 결정됩니다. 창고를 늘리는 것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였기 때문에 에수님은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경제구조가 인구 10%만이 경제적 여유가 있고, 나머지 90%는 극심한 빈곤층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농부는 풍성한 소출을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어리석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 중에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이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기자는 목적으로 사업을 확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탄의 공격 방법 ‘소유의식 부추기기’
부자의 어리석음은 이기주의에서 나옵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서 사탄이 인간을 공격하는 중요한 전략이 소유의식입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열심을 다해 네 시간은 나의 것이라는 기묘한 생각의 환자(환자라는 것은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인을 환자라고 합니다)의 마음속에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억지로 떼어 줘야 하는 부담스런 세금으로 여기게 하고 종교적인 의무들로 할애하는 시간은 너그러운 기부금으로 여기게 하라. 네가 주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부추길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들은 늘 자기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천국에서 듣든 지옥에서 듣든 우습기 짝이 없는 소리다. 인간이 그런 우스운 소리를 계속 떠들게 하는 게 우리의 일이야.’
사탄도 소유의식이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험한 생각을 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도 나의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순종하고 내가 복종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내가 조종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줘야 되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어떤 평가를 받기 원하십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을 비교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를 살 수 있지만 잠을 살수 없다. 돈으로 책은 살수는 있지만 지혜는 살수 없다. 돈으로 음식을 살수는 있지만 입맛은 살수 없다. 돈으로 아름다운 장식품을 살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수 없다. 돈으로 약은 살수가 있지만 건강은 살수 없고,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수 없다. 돈으로 사치품은 살 수 있지만 문화는 살수 없다. 돈으로 종교는 살 수 있지만 구원은 살수가 없다. 돈으로 어디로 갈수 있는 비행기 표는 살 수 있지만 천국으로 가는 표는 살수 없다.’
예수님이 어리석은 농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 네 영혼을 네게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너를 위해 장만한 것들을 다 누가 갖게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20~21절)
세계에서 가장 부자였던 록펠러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그의 회계사에게 그가 죽으면서 얼마를 남겼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회계사는 그가 가진 전부를 남겼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를 가지고 있든지 전부를 남기고 갑니다.
“그가 자기 어머니의 모태에서 벌거벗은 모습대로 나올 때처럼 돌아가며 그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전 5: 15).
우리는 태어날 때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지만, 돌아갈 때는 손을 펴고 죽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이 노벨상을 제정했습니다. 이 사람이 노벨상을 제정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동생이 죽었는데 신문사에서 잘못해서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고 기사를 냈습니다. 언론에서 일제히 이 사람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스웨덴의 화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프레드 노벨에 대해 혹평했습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알프레드 노벨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뉘우치고 900백만 달러나 되는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습니다. 그리고 인류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을 위해 노벨상을 제정했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의 사망기사가 나온다면 우리 인생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충분한 정보가 없고, 편견 있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떤 평가를 받기 원하십니까.
어리석은 부자와 하나님께 부유한 자
부자라는 단어는 매우 상대적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부자가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누구와 비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록펠러와 비교하면 우리 모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을 떠나 다른 곳을 여행하면 우리 모두는 부자가 됩니다. 세계 인구 8억 명 정도가 굶주린 채 잠든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섯 살 이하 어린이 2억 명 정도가 영양부족상태입니다.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식량 불평등은 탐심과 소유의식 때문에 생겼습니다, 세계인구 3분의 1이 전체 식량의 80%를 먹어 치우고, 나머지 3분의 2를 얻기 위해 인구 20%가 싸우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 모두는 부자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부자입니다. 문제는 어리석은 부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부유한 자로 살 것 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신 분으로서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하심을 통해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
예수님은 부유했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없어질까 봐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거저 주는 사람은 더 많이 얻게 되지만 지나치게 아끼는 사람은 가난에 이른다.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남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자신도 목이 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 ”(잠 11:24~25).
베풀고 구제하면 더욱 부유하고, 남에게 물을 주면 자신도 목마르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반대로 과도하게 아끼면 더욱 가난해집니다. 어떤 약속을 믿고 의지하시겠습니까. 구제하면서 축복을 누리는 삶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기도합시다
잘못된 소유의식에 사로잡혀 어리석게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자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귀한 인생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베풀고 구제하면 더욱 부유하고, 과도하게 아끼면 더욱 가난해집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는 통로가 되십시오.
작성자 김남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