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 | 다툼과 영접의 법칙
말씀: 하용조 목사마태복음 10장 34~42절복음은 우리에게 평화를 줍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연합과 일치를 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합니다. 칼은 전쟁입니다. 분리입니다. 칼은 죽이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갈등을 줍니다. 분리를 줍니다. 이것은 평화와 기쁨과 일치를 주는 것과 상반된 이중적 개념입니다. 복음의 이중성 왜 이런 말이 있을까요? 복음은 어두운 데서 빛을, 분리된 데서는 연합을 줍니다. 그러나 거짓과 세상의 악, 사탄의 세력과는 싸우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평화의 도구가 되지만 동시에 악한 사람, 악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는 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타협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다투게 하려고 왔다.”오해하지 마십시오. 싸움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면에서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복음적인 것, 사탄에 속한 것은 타협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닙니다. 악과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이 두 양면성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물보다 피가 진합니다. 피보다 진한 것은 믿음입니다. 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원리입니다. 가족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악과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예가 사도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죽였습니다. 바울 자신도 예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만 예수를 알고 자기 민족, 자기 가족, 자기 혈육이 기가 막힌 일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민족을 포기할 수도 없고 예수님도 포기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내용이 로마서 9장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을 구원하지 못하면 자신이 저주받아도 좋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도 자기 민족이 죄를 범했을 때 괴로워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1~32을 보면 금으로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기 민족과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데 자기 민족과 자기 가족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복음을 알면 가족을 위해 고민하게 됩니다.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버릴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율배반적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그러므로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다. 나보다 자기 아들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더 최상급의 사랑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과 가족을 비교해보다 결국 자기 가족, 자기 민족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치는 민족의 가치나, 가정의 가치나, 직장의 가치보다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높다는 것입니다. 최상급 사랑 하나님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고,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38절)고 하십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기쁘고 좋은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런 부담을 줍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희생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 교회를 사랑한다 하지만 다 자기 것을 챙기며 사랑합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호하고 더 잘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누구든지 다 십자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온 인류의 죄를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도 다 자기 십자가가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자기 성격일 수도, 자기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내가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장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날마다’입니다. 한번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 가시가 날 찌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포기하지 말고 지고 날 따르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보니 가장 큰 십자가는 자기 성격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내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매일 매일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는 ‘죽었다고 생각하고’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여기서 영접이라는 개념은 섬김이라는 개념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이 되기보다 우리 의견, 우리 생각 등 자신도 모르게 자꾸 자기를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장해야합니다. 나를 죽여야 합니다. 작은 자를 섬김으로 받는 상 41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예언자를 예언자로 여겨 영접하는 사람은 예언자의 상을 받을 것이고 누구든지 의인을 의인으로 여겨 영접하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다.”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내가 예언자가 아니고 의인이 아니라도 예언자를 섬기면 예언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섬기면 의인의 상을 받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의 상을 받는 것입니다.42절을 보십시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내 제자라는 이유로 이 작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성경은 이 작은 자의 개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작은 자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이 작은 자에게 행한 섬김을 예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섬기면 예언자의 상을 줄 것이요, 의인을 섬기면 의인의 상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용서요 화해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이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못된 성격을 지고 매일 매일 나를 죽여야 합니다. 매일 나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해야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성격을 못 죽이면 절대로 남 못 섬깁니다. 교회를 못 섬깁니다. 하나님을 못 섬깁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승리가 여러분에게 흘러넘치기를 바라고, 하루하루가 매일 간증이 되길 축원합니다. / 정리 전성희 기자 shee@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