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 기도의 자리, 능력의 현장
이재훈 목사 / 마가복음 1장 35~45절
진정 혼자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고독, 그것이 외로움이 아닌 창조적인 고독이 될 때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다른 상황 속의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모습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동일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피하여 외딴 곳에 혼자 계시는 모습입니다.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외딴 곳이라는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황폐한 땅, 외딴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 머물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외딴 곳에 머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로 사람들의 요구나 문제를 해결해 주셨지만 사람들의 또 다른 목적에 이끌려가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청에 응답해 주셨지만 사람들의 불필요한 요구에는 이끌려 다니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서른 셋,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데 여한이 없으셨습니다. 33년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모든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생애는 바쁘고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종은 쉴 틈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틈도 없이 계속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외딴 곳으로 가서 혼자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나오고, 두 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모습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을 받는 일을 예수님께 제의하면서 유혹했습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 메시아가 되는 길, 사람들의 인기로 메시아가 되는 길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유혹하는 많은 무리들을 거부하시고 하나님 앞에 홀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고독 안식일에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중에 귀신들린 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39절) 또한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십니다. 그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만나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피곤한 날 새벽에도 육체적인 피곤을 넘어선 기도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루의 일과는 피곤했지만 예수님은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피곤한 몸에도 새벽마다 잠을 깨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때 육체의 피곤을 넘어서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른 새벽 일어나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습관, 라이프스타일은 제자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했기 때문에 홀로 있을 시간은 이른 새벽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혼자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지 못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 혼자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고독, 그것이 외로움이 아닌 창조적인 고독이 될 때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고독을 보내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삶입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홀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느냐,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외로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 외로움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외로워질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고독, 홀로 있는 외로운 광야 같은 시간이지만 인내와 믿음을 통해 그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꿀 때 진정한 영적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균형 잡힌 예수님의 삶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모셔가려고 했습니다.(36절) 그러나 예수님은 “가까운 이웃 마을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러 가자는 제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 가운데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창조적인 고독의 시간을 보내셨던 예수님은 다른 영혼을 향한 창조적인 열정을 갖고 사셨습니다. 참된 영성은 결코 내면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진정 홀로 있는 훈련이 된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동역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땅 끝을 향하여 전도하러 나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영성과 다른 사람을 향한 영성의 균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전도의 생활로, 사역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40절에는 예수님과 한 병자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믿음을 갖고 나왔습니다. 당시 나병은 전염성이 있는 병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은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손을 대고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손을 대셨을까요? 손을 댄 환자는 전염성이 있는 나병 환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가 되시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나병 환자가 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병자의 병이 예수님께로 옮아오고, 예수님의 생명이 병자에게 옮겨갑니다. 이 사람에게 생명이 전달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았던 수치, 모멸감, 외로움, 상처들이 다 예수님께로 전달된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주셨을 때,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회복되었다고 믿습니다. 한 번도 지금까지 그 몸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인자한 손으로 손을 대고 고쳐 주셨을 때 나음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주는 압력,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많은 압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적인 압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깊이 있는 압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오늘 큐티의 제목처럼 우리가 언제나 기도의 자리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능력의 현장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어떤 압력이 올지라도 쓰러지지 않고 그 압력을 이기며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kr
진정 혼자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고독, 그것이 외로움이 아닌 창조적인 고독이 될 때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다른 상황 속의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른 새벽에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모습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동일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피하여 외딴 곳에 혼자 계시는 모습입니다.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외딴 곳이라는 곳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황폐한 땅, 외딴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 머물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외딴 곳에 머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로 사람들의 요구나 문제를 해결해 주셨지만 사람들의 또 다른 목적에 이끌려가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청에 응답해 주셨지만 사람들의 불필요한 요구에는 이끌려 다니지 않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서른 셋,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데 여한이 없으셨습니다. 33년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모든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생애는 바쁘고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종은 쉴 틈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틈도 없이 계속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외딴 곳으로 가서 혼자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외딴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 나오고, 두 번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모습의 공통점은 많은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을 받는 일을 예수님께 제의하면서 유혹했습니다. 고난을 겪지 않고 메시아가 되는 길, 사람들의 인기로 메시아가 되는 길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유혹하는 많은 무리들을 거부하시고 하나님 앞에 홀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고독 안식일에 예수님은 가버나움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중에 귀신들린 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39절) 또한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십니다. 그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십니다.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만나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피곤한 날 새벽에도 육체적인 피곤을 넘어선 기도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루의 일과는 피곤했지만 예수님은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피곤한 몸에도 새벽마다 잠을 깨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을 때 육체의 피곤을 넘어서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삶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이른 새벽 일어나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습관, 라이프스타일은 제자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함께했기 때문에 홀로 있을 시간은 이른 새벽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혼자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지 못합니다. 또한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 혼자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고독, 그것이 외로움이 아닌 창조적인 고독이 될 때 우리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창조적인 고독을 보내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삶입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홀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느냐,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외로움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 외로움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외로워질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고독, 홀로 있는 외로운 광야 같은 시간이지만 인내와 믿음을 통해 그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꿀 때 진정한 영적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균형 잡힌 예수님의 삶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모셔가려고 했습니다.(36절) 그러나 예수님은 “가까운 이웃 마을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러 가자는 제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 가운데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창조적인 고독의 시간을 보내셨던 예수님은 다른 영혼을 향한 창조적인 열정을 갖고 사셨습니다. 참된 영성은 결코 내면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진정 홀로 있는 훈련이 된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 함께 동역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깁니다. 땅 끝을 향하여 전도하러 나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영성과 다른 사람을 향한 영성의 균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전도의 생활로, 사역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40절에는 예수님과 한 병자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있습니다.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믿음을 갖고 나왔습니다. 당시 나병은 전염성이 있는 병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은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병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손을 대고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손을 대셨을까요? 손을 댄 환자는 전염성이 있는 나병 환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가 되시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나병 환자가 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병자의 병이 예수님께로 옮아오고, 예수님의 생명이 병자에게 옮겨갑니다. 이 사람에게 생명이 전달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았던 수치, 모멸감, 외로움, 상처들이 다 예수님께로 전달된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주셨을 때,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회복되었다고 믿습니다. 한 번도 지금까지 그 몸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인자한 손으로 손을 대고 고쳐 주셨을 때 나음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주는 압력,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많은 압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적인 압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깊이 있는 압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오늘 큐티의 제목처럼 우리가 언제나 기도의 자리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능력의 현장이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어떤 압력이 올지라도 쓰러지지 않고 그 압력을 이기며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