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부흥집회

1월 8일 | 지붕을 뚫는 믿음

이재훈 목사 / 마가복음 2장 1~12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한 한계상황일지라도 지붕을 뚫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용서와 치유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1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나병을 고치신 이후 수많은 군중들을 피해 계시다가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가버나움 부흥집회’라는 현수막을 내걸지 않으셨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문 밖까지도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2절)이 때 기가 막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네 사람이 한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3절) 이 사람들은 아마 소식을 늦게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중풍환자를 데리고 오느라 지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뒤늦게 온 탓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 사람들은 아주 도발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지붕을 뚫고 그 환자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집은 쉽지는 않지만 원하기만 한다면 뚫을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붕은 대체로 낮은 편이었고, 지붕에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집집마다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천정에서 흙이 떨어지면서 아마 예수님의 머리가 먼지로 뒤덮였을지 모릅니다. 말씀이 중단된 것을 물론 사람들의 머리에 파편이 떨어지면서 들것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행동을 했겠습니까. 이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네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관찰됩니다.

네 사람이 보여준 믿음

첫째, 네 사람 모두 지붕을 뚫는다는 아이디어에 ‘동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 생각을 무시하고 대들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두 사람도 안 됩니다. 네 사람이 힘을 합쳐야 들것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중풍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 네 사람이 마음을 합쳐 주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D. L. 무디 선생님은 이 본문을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이 합력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전도의 모델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는 장벽이 참 많습니다. 교회에 대한 심각한 상처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든 것이라도 뚫어줘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중풍환자는 들어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뚫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붕은 물론 땅굴이라도 뚫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네 사람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도 고칠 수 없다’라는 의심이 있었다면 지붕을 뚫는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예수님이 이 환자를 고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을 때 그 믿음은 역사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크기가 아니라 질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네 사람의 마음에는 ‘긴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지금 만나야 한다는 절박한 믿음입니다. 먼 훗날 때가 되면 또 만날 날이 있겠지 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만나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류하고 그저 마지막에 언젠가 해도 되는 선택쯤으로 남겨두려 합니다. 지금은 세상에 몰두하면서 마음대로 살다가 십자가 위의 강도처럼 마지막에 믿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위의 강도는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은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넷째, 네 사람에게는 이 환자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네 사람은 지붕을 뚫은 변상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르자’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돈을 한 푼도 안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대가를 치르고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손실보다 한 생명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여기신 행동

예수님은 지붕을 뚫은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5절)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믿음의 행동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환자의 믿음이 아니라 들것을 달아 내린 네 사람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물론 환자도 믿음이 있었겠지만 친구들에게 주도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얻을 때 그 사람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 전에 그 사람이 변화되기까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까지는 주변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나오신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와 믿음을 통해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와 주변 비신자들이 구원에 이르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적인 하나님의 용서

네 사람이 기대한 것은 병 고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네 사람의 기대를 깨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도발적인 사건을 통해 더욱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는 어떠한 당황스러운 사건도 좋은 메시지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회개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용서함을 주시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용서가 주어진다면 용서 받지 못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복음적인 하나님의 용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고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어떤 각성과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용서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입니까. 용서의 나라, 화해의 나라,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아버지의 은혜의 나라를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율법학자들은 ‘하나님 한 분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은 옳습니다.(7절)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도 이 사실을 알도록 말씀하셨습니다.(8절) 율법학자들의 생각을 꾸짖으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2009년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한 한계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용서와 치유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차명권 부장 salt@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