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집회2-내면세계를 파괴하는 영성
고든 맥도날드 | World Relief 총재 아덴에서 고린도로 왔을 때 무슨 이유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사도 바울은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아덴과 달리 고린도에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린도교회는 몹시 교만했고,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변질시키고 지도자를 영웅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바울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볼로가 영웅이었고 그들은 영웅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거할 때 약한 가운데 왔고 두려운 가운데 왔으며 연약한 자로 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매력적인 지도자를 원합니다. 위대하고 탁월한 능력이 있는 지도자, 모든 것에 박식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왔을 때 자신은 연약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바울 사도 바울이 겸손한 척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실제로 연약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첫째,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사도바울은 삶을 통해 경험한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25년 동안 그가 겪었던 고난을 고백합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공통적인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신체적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연약하여 아마도 사도 바울은 누가라는 의사가 항상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는 계속 투병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둘째, 12장 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자고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 육체에 가시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가시가 떠나기를 위하여 3번이나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에게 육체적 모순이 있다고도 하고, 말라리아가 있다고도 하고, 시력에 문제가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 이 육체의 가시는 진짜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인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기독교가 시작한 이래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똑똑한 사람과 변론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주장합니다. 결국에는 고집을 부리고 화를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변론하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차이가 있었을 때 바울은 결국 바나바와 헤어지기로 결정합니다. 참 슬픈 일이지만 저는 바울에게 그런 일이 자주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와 조금만 언성을 높이면 바울이 화를 내고 그의 탁월한 두뇌로 상대방을 마구 공격해서 상대가 좌절하여 떠났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고민하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중에 하나님이 해결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왜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신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덮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덮으실 것입니다. 연약함에 임하시는 은혜 사도 바울의 세 번째 연약함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을 보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2년 동안 기거했습니다. 그곳에 유하는 동안 사도바울을 대적하는 적들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매일매일 살인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가 거리에 나갈 때마다 누군가 자기를 찌르고 달아달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노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가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이 말은 적극적으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확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두려움을 움켜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가 연약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네 번째 연약함을 소개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평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사도 바울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 34년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은 결코 일꾼이 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은 왕이 되고 싶어 하고, 항상 지도자위치에만 있습니다. 바울도 이런 생각을 34년 동안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일꾼이라고 인정합니다. 일꾼과 종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종은 항상 자기 자신을 먼저 두지 않습니다. 종은 항상 다른 사람의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약한 사람으로 보는 것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흥의 열쇠 ‘회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6~19) 사도 바울은 내 안에 거하는 두 부류의 바울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는 선한 일을 하기 원하고 하나는 선한 일을 하기 원치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날마다 싸우고 분쟁하는데 가끔 바울이 질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통회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사도 바울은 그의 영혼가운데 가장 연약한 부분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마 모두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결코 잘못을 시인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속에 무너진 것이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보고 있습니다. 부흥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의 죄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성과 죄를 범할 가능성을 발견할 때 시작됩니다. 이것보다 더 연약함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연약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능력 외에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연약함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연약한 상태와 위치에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임할 것입니다. / 정리 서철 기자 chol@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