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사역

깊어가는 가을, 신앙으로 물들다 – 경기도편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이천‧수원지역 기독교 유적지를 가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1

(이천 대월면 초지리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기독교 유적은 예배당과 병원, 학교, 선교사 주거지 등 기독교 신앙과 문화의 도입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기독교 문화재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신앙 선조들이 남긴 믿음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기독교 유적지는 전국 팔도에 퍼져있다. 가장 먼저 경기도에 있는 기독교 유적지를 찾았다. 경기도 이천 기독교역사박물관과 수원에 있는 노리마츠 선교사 기념비가 바로 그곳이다. 지금부터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아가보자.

 

 

장대현교회 복원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장대현교회 체험

(장대현교회에서 할 수 있는 성경판화 체험)

 

1903년 평양,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의 회개는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부흥의 불씨가 되었다. 길선주 목사도 몸을 구르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렇게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장대현교회가 있었다.

이천IC에서 남쪽으로 빠져나오면 대월면 초지리가 나온다. 언덕을 따라 오르면 노인요양원 ‘한나원’ 옆에 3층 벽돌건물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이다.

작은 정원과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는 장대현교회를 1/5로 축소 복원해 놨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설립한 한영제 장로는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1907년 부흥운동 발상지인 장대현교회를 복원했다. 축소 복원한 장대현교회에 들어가면 당시 성도들이 입던 검은 두루마기와 치마저고리를 입어볼 수 있다. 당시 성도들이 읽던 성경을 판화로 찍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는 10만여 점의 기독교역사 관련 자료가 2, 3층에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초기기독교 잡지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타자기, 길선주 목사 설교집,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 광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3층에는 대구 톰스 선교사의 엽서, 세필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의 ‘부활 후’, 한국문화와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 담긴 크리스마스 실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방문 전에 미리 전화로 예약하면 자세한 설명과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문의: 031-632-1391

 

구연영 전도사 추모비

(구연영, 구정서 부자 전도사의 추모비. 이천중앙교회 주차장 앞 화단에 홀로 서 있다)

 

의병 구연영, 칼 내려놓고 성경을 들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서 차로 20분 정도 이동하면 또 다른 기독교 유적지가 나온다. 이천중앙교회 주차장 앞에 세워진 구연영, 구정서 전도사 부자 순국추모비다. 1979년 제작됐다.

구연영 전도사는 186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의병으로 참전해 1896년 1월 경기도 이천 수광리 넓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 그는 1897년에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구연영 전도사는 생전에 이천읍교회(현 이천중앙교회)를 비롯해 9개 교회를 섬겼는데 칼 대신 성경을 들고 ‘십자가 구원’을 외치며 이천, 광주, 장호원, 여주 지방을 순회했다. 자신의 집 앞에는 장대 끝에 십자가를 매달아놓고 예배를 드렸고, 의병활동과 선교활동, 애국계몽활동도 병행했다. 그러나 일진회의 밀고로 장남 구정서와 함께 총살당했다. 향년 44세, 아들은 25세였다.

교회 주차장 앞 화단에 외로이 자리 잡고 있는 구연영, 구정서 전도사 부자 순국추모비는 우리나라 교회 역사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수원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지기까지

 

 

수원은 1890년대 당시 외세에 대한 반감이 심한 지역이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수원 성안에 있는 가옥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화성 유수들의 반발이 심했다. 어렵게 북문 안쪽 보시동에 선교 근거지를 마련한 이후에야 수원읍교회(현 수원종로교회), 삼일학교, 매향학교 등이 세워졌다.

수원 팔달구 북수동 386번지에 위치한 수원종로교회는 1899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이주시킨 서울의 영향력 있는 교인 몇 가정으로부터 시작됐다. 1901년에는 이명숙 전도사가 북문 안쪽 보시동에 13칸짜리 초가를 구입해 선교 근거지를 마련했다. 1902년 스크랜턴 부인은 매향여자중학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를 세우고 1년 후 삼일학교도 설립했다. 삼일학교 현관은 2001년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되었다.

1908년 수원 종로교회를 중심으로 ‘수원지방’을 조직했고, 1912년에는 수원뿐만 아니라 충북지역과 여주, 이천 등 경기 동부지역과 안산 등 경기 서부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수원동신교회 (2)

(수원동신교회에 세워진 노리마츠 선교사 비)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선교사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은 미워하지만, 노리마츠 선생의 일본은 미워할 수 없다.”

노리마츠 마사야스 전도사 기념비에 적혀있는 글귀다. 일본 메이지학원대학 신학부를 다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 전도사는 1896년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된 뒤 조선선교를 결심했다. 조선인들에게 사죄하고 희망을 잃은 조선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돌보고자 그해 12월 23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여인숙 주인의 도움으로 조덕성을 소개받고, 1897년 1월부터 한글을 배우며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이후 수원 장안동으로 이주해 자신의 집을 ‘성서강론소’로 삼고 선교활동을 펼쳤다.

노리마츠 선교사는 한복을 입고, 한국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만큼 한국을 사랑한 일본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1921년 2월, 조선에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고향 오다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1922년 동신회 수원교회 성도들은 그의 유골을 가져와 동신교회 뜰에 묻고 기념비를 세웠다.

동신교회는 수원 화홍문에서 천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옆에 위치해있다. 동신교회를 찾아가는 길목은 가을빛으로 흠뻑 물들어 아름답다. 생각 없이 걷다보면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낡고 오래된 건물이다. 그만큼 역사가 깊이 깃들어 있다. 바지랑대와 농작물이 늘어진 마당 위에 노리마츠 선교사 무덤과 기념비가 서 있다.

일본 개신교 최초 해외선교사로 손꼽히는 노리마츠 선교사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 부부의 일화가 떠오른다.

평생 조선인처럼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했던 노리마츠 선교사 부부는 쌀 한 톨 없는 집에서 조선 청년 한 명을 먹이기 위해 머리카락을 팔았다. 다른 이들은 먹이고 자신들은 영양실조로 고생했다. 병든 몸을 이끌고 3.1운동하는 조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기까지 했다. 그곳에 가면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수원동신교회 (1)

(수원 동신교회 전경.)

 

작성자  정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