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 십년 전, 그 교회에 불이 붙었다
대한민국 기독교, 그 찬란한 역사를 만나다
경기도 용인 소래교회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총신대 내 위치한 조선 최초의 자생교회 ‘소래교회’)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조선 최초의 자생교회가 있었다.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래에 세운 소래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소래교회는 초가로 지어졌다가 1895년과 1896년 두 차례에 걸쳐 증축했다. 총 16칸 105.7㎡(32평)의 기와집 교회가 됐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 초기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소래교회 성도였다. 장로교 최초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도 소래교회 성도들이 주축이 되었다. 한국에 오는 선교사들은 소래교회에서 한국의 전통과 선교 방법을 익혔다. 소래교회는 한국선교를 위한 전초기지였다. 하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쇠퇴했다. 성도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소래교회는 문을 닫았다.
조선 최초 자생교회 ‘소래교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 527-1번지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가 복원되었다. 팔작지붕에 ㄱ자 형태의 한옥이다. 1896년 증축되었던 예배당 모습 그대로다. 마당에는 소래교회 설립자인 서상륜의 기념비와 최권능 목사의 기념비, 한국교회의 선각자 이수정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교회 내 기도실은 지금도 이용한다.
소래교회를 세운 서상륜, 서경조 형제는 의주 사람이었다. 인삼 장사를 위해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은 장사에 실패하고, 그의 형제가 장티푸스에 걸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가 그의 형제를 밤낮으로 간호해 병이 나았다. 그 일로 인해 서씨 형제는 기독교 신자로 거듭났다.
1879년 두 형제는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성경번역을 도우며 그와 함께 살기도 했다. 1882년 10월, 한글성경 등 기독교 책자를 갖고 있던 형제 중 한 명이 불심검문에 걸려 투옥됐다. 우여곡절 끝에 탈옥해 가족과 함께 친척이 살고 있던 장연으로 이주했다. 이주한 다음 해인 1883년 그의 고향 황해도 장연군 솔내에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서경조는 한국에서 최초로 안수를 받은 장로교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 됐다.
초가집으로 시작한 소래교회는 서씨 형제의 열정적인 전도 덕분에 활기를 더해갔다. 마을 전체 58가구 중 50가구가 교회에 나오게 됐다. 형 서상륜이 서울로 사역무대를 옮긴 후 소래교회는 동생 서경조가 이끌었다.
말콤 펜윅 선교사와 소래교회의 부흥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나기 십년 전인 1897년 소래교회에서 부흥의 불길이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는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1889년 독립선교사 자격으로 황해도 소래에서 사역했다. 1893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신학공부를 한 뒤 다시 조선으로 왔다. 원산으로 거점을 옮겨 사역을 시작했다.
1896년 겨울, 펜윅 선교사는 원산을 떠나 황해도 소래로 향했다. 소래에 도착한 그는 그날 밤부터 예배당에서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당시 소래교회 기도모임에는 300여 명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예배드렸다고 한다. 기도회를 한지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기도하던 펜윅 선교사가 성도들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감격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죄인의 수가 아무리 많고 아무리 악해도 성령의 역사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미워하는 성도 두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곳 성도들 중에 누가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사람이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연유가 무엇인지 쏟아냈다. 이야기를 들은 펜윅 선교사는 그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미워했던 사람에게 사과하기를 권유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미워하던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화해를 했다.
주일이었던 다음 날, 회개했던 그 사람이 모든 성도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간증했다. 그때 갑자기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모든 성도들이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울부짖기 시작했다. 부흥의 불길이 소래마을을 뒤덮었다. 성령이 임하는 곳마다 성도들의 심령이 새롭게 변화되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
소래교회와 3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Acts29 비전빌리지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나있는 길로 1km 정도 올라가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표지판이 나온다. 기념관 입구로 난 500m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순교자들의 이름과 성경말씀을 새겨놓은 자연석들을 볼 수 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1989년 11월 개관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고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며 개관했다.
기념관은 1,209.9㎡(366평) 규모에 아름다운 직사각형 3층 건물로 지어졌다. 1층 중앙홀과 계단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교회사를 보여주는 역사화 4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예배실에는 한국교회 초창기(1884-1920) 선교현장기록사진 12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 풍속화 및 기독교 성화의 대가 김학수 화백이 그린 ‘대동강변에서 순교하는 토마스 목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 제물포 도착’, ‘제암교회 학살사건’, ‘일제강점기 사경회’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전시된 사진 중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소재 몬트리트 역사자료센터 소장자료 등 희귀한 자료가 많다. 한국교회 초창기에 활약했던 선교사들의 생생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3층은 순교자 전시실이다. 토마스 선교사 순교 이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220여 순교자들의 초상과 그들이 남긴 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다. 100여 년에 불과한 짧은 역사이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2,600명이 넘는다.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의 피와 생명을 드림으로써 신앙을 지켰다. 그들이 바친 피와 생명의 값진 토대 위에서 우리는 지금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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