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5 송구영신 40일 새벽기도회/시편 73편/이재훈 목사
시편 73편
이재훈 목사
시편 73편 (시 73:1~3, 15~19, 25~28)
이 새벽에 우리 모두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상처 받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나님께 상처받았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어떤 의미일까? 3가지 경우에 쓰게 되는데 첫째는 내가 간절히 구하고 원하고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을 때 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아주 영적으로 낮은 수준에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애쓰고 매달리고 구했지만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을 때 “나 하나님께 상처받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는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뜻하지 않았던 엄청난 고난을 겪을 때, “나 하나님께 상처받았다”이런 표현을 쓴다. 구약에 보면 나오미라는 여인이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모합 땅으로 갔을 때 남편과 두 아들이 그곳에서 죽는다. 그리고 이방 며느리, 두 며느리와 함께 남게 되었을 때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환영했다. 그녀는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뜻이고,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또한 믿었다는 것이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고 고통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하나님께 대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 나에게는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 이 고통을 나에게는 주셨을까?” 참 이해할 수 있는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세 번째 영적으로 좀 더 고차원적인 상처는 자신이 믿는 진리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전혀 조화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은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 법칙대로 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역사와 세상을 보면서 악인이 득세하고 선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이 도리어 고통받고 시련당하고 의인이 악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 의인을 지배하고 또 의인은 고난을 계속 받고 고난 중에 죽어가고, 악인은 형통하고 잘 살고 평안하게 있다가 죽을 때도 평안한 모습을 보게 된다. 역사의 부조리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한탄하고, 또 하나님께 상처받는 것이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지구상에서 보면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넘쳐나서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병에 걸리는 사람이 있고, 그 남는 쓰레기만 몇 시간 걸린 지역으로 옮겨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살 수 있는데, 하나님 왜 이세상이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겁니까? 이렇게 역사를 보면서 삶의 여러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호소하는 것, 그런 종류의 상처는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읽은 73편은 세 번째 종류의 상처인데, 아삽이라는 시인 저자의 시다. 그는 1-2절에서 자신의 실족함을 시험을 고백하고 있다.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그는 거의 넘어질 뻔 했다. 걸음이 미끄러질 뻔 했다. 실족했다는 말을 쓴다. 발이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 믿음의 여정, 발걸음이 미끄러지고 거의 넘어질뻔 발걸음이 미끄러질뻔, 완전히 넘어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넘어질뻔 한 것. 시편 기자가 믿는 진리가 있다. 시편 기자가 믿는 믿음이 있다. 1절에서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붙잡고 산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정결하고, 의롭게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베푸시고 선을 베푸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란 믿음을 갖고 믿음으로 정결하고 의롭게 깨끗하게 살았다. 그런데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그 믿음이 틀린 것 처럼 그 믿음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을 본 것이다.
그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4-12절)3절에 보면,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악인의 형통함, 오만한 자가 계속해서 잘 되는 것을 보고 그는 질투가 일어난 것이다.
악인의 모습을 보면 표현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했는지… (4-12절)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난도, 재앙도, 죽을 때도 고통도 없고,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이 있고, 하나님을 대적도 하고, 그런데 여러분 안에 이 말씀을 읽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게 되기를 바란다. “이거 누구랑 비슷한데? 이거 이 말씀 누가 들어야되는데…”라고 다른 사람에게 빗대어 말씀을 적용하지 마라.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한다. 다른 사람을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라.
이런 악인들의 구체적 모습을 보는데 정작 이 시를 쓴, 1절에 본 것처럼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는 선을 베푸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의롭게 살았던 시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13-14절)에는 이 시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나온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이게 뭔가 거꾸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손을 깨끗하게 씻고 살았는데 그게 다 헛수고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모습, 이 정도면 상처받았다 말할만 하겠죠. ‘하나님 이렇게 의롭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은 종일 고난을 당하고, 악하게 사는 사람이 저렇게 형통한데 그럼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라는 영적인 고민, 갈등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다.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영향력은 영적 정상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골짜기를 지나며 고민하고 갈등하는 영적인 고민들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다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공감이 오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고난 중에 있었는데, 나도 이런 고민이었는데, 나도 이렇게 억울했는데, 나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한탄한 적이 있는데’ 그 골짜기부터 시작해서 영적인 등산을 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시편은 시작은 언제나 억울했고, 시작은 언제나 한탄이었고, 시작은 언제나 불평이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여정을 하다보면 어느샌가 그것이 찬양으로 변하고, 감사로 변하고, 승리의 고백으로 변화되는 것 이다. 시편을 늘 기도로 묵상하고, 기도로 삼으면 우리가 어떤 삶의 형편의 있든지 영적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 그것을 인도해주는 영적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것, 우리의 영성은 하루 아침에 오르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 성장의 과정이 있듯이 성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없듯이, 영적 거장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다 이런 시편기자들이 겪는 삶의 형편에서 고민을 겪어가면서 차츰차츰 성장하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영적 거장이 되는 사람은 없다. 이 시편 기자의 하나님을 향한 고백, 하나님을 향한 안타까운 상처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악인이 형통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허락하시고, 의인이 도리어 고통 받도록 하시는가? 그의 믿음이 무너질 것 같은거죠.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지 않고, 축복을 베푸시지 않고, 악인에게 이러한 형통함을 주시는가. 자신이 믿는 진리와 역사의 현장이 너무나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겐 엄청난 고통이 되었던 것이다.
15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받는 상처, 실족함, 영적인 시험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불만이 가득해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인들을 볼 때마다 불평이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분노도 일어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놀랍게도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스스로 이르렀다. 시편 기자는 아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만 절제한 것이다. 그들처럼 말하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악행을 행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속에서 솟아나는 말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다 내뱉지 않았다. 내가 만일 ‘그렇게 말했더라면 그것은 이 시대에 주의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입조심을 했다는 것이다. 혀끝에서 나오는 말을 꾹 참고 그 입에 파수꾼을 세웠다. 이것은 쉽지 않다. 또 다른 시편 기자는 비슷한 상황에서 놀라서 말해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죠. 사람이 상처를 입으면 상황을 자꾸 과장해서 보게 된다. 실제 본인이 겪은 것 보다 과장하게 되고, 덧붙이게 된다. 의심과 불신의 말을 성급히 내뱉는 것은 자신의 영성도 흐릴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삽이란 시인은 다른 형제들에게 악을 행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나의 불신의 말, 의심의 말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서로 엮어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역사의 부조리, 이 모든 상황을 성급히 말하지 않으리라. 영성의 출발은 말의 제어부터 있는 것이다. 언어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영성은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 야고보서에도 나온다. “말의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자다.” 혀를 재갈물리지 않으면 또다른 악을 행하게 된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의로운 것을 행한다 하지만 자신이 또 다른 악을 범하는 것이다. 여러분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동기를 가지고 악을 행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행하는 의로움은 모두 다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의로운 동기를 가지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추구하는 이상은 의 인데, 또 다른 악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파괴고, 또 다른 악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인은 이것을 절제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간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신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는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는 문자 그대로 성소다.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건물, 성소, 장소다. 예배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인이 말한 그대로 성소에 들어가면서 그는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었다. 성소에 들어가면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예배하는 무리들을 만났을 것이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깨닫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은 고민했을 것이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이 고통 받는가?” 하나님 앞에서 고통하고, 실족하고, 고민하며, 믿음이 다 무너지는 것 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면서부터 해결책은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성소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에서 영적 고민들을 혼자 자기 안에서 해결해보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말씀보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함께 나누고 공동체에서 함께 나누고 이렇게 해결하고 깨달아가는게 얼마나 많습니까. 결코 믿음은 내가 믿는 한 가지 믿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성소에 갈 때 우리는 겸손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하고 믿음을 지켰던 교회 역사의 수많은 선배들을 보면서 내가 믿었던 그 진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시편 기자가 붙잡은 진리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는 선을 베푸시고, 축복을 베푸시고, 악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그의 믿음을 형성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원리다. 그러한 믿음의 세계로만 보면 해결되지 않은게 너무 많은 것이다. 이 시편기자가 믿고 있는 진리는 진리의 한 단면일 뿐이다. 진리는 절대 단순하지 않고, 입체적이다. 진리의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하면 언제나 진리의 한 가닥만 붙잡고 모든 인생과 역사를 해석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형태로 주시고, 우리에게 수많은 케이스들을 주신 것이다. 성경은 말하면 Case Study Book이다. 한 시대에 대개 보면 유교, 불교, 타종교 사상을 보면 어느 한 시대에는 적용되지만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진리란, 한 시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문화권에도 다 적용되야 진리죠. 한 시대에 사람들이 진리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그것만 붙잡고 있을 때에는 해석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그는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깨닫지 못했던 전부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진리를 전체로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진리를 전체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가 성숙해서 깨달은 것은 악인의 종말을 깨달은 것이다. 악인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깨달았다. 시작만, 진행되는 상황만 봤을 때는 자신이 믿은 진리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을 축복받지 않고 왜 고통받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족하고 넘어질 뻔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깨달은 것은 악인 조차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인을 저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형통하도록 버려두지 않는 다는 것이죠.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의 종말을 황폐하게 하시고 전멸하게 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때까지 허락해두신 형통함이지만, 그 종말은 틀림없이 전멸이다. 역사의 교훈이지 않습니까? 노아의 홍수 심판을 통해 종말을 보았고, 바벨론에 대한 심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 하나님 없이 형통한 자는 절대로 영원한 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분명히 진멸하신다는 것, 그 악인의 종말을 깨달은 것이다. 깨달음이 있어야 된다. 시편 57편은 의지적 신앙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메말라버려도 내가 확정된 마음으로 은혜로 찬송하리로다. 믿음의 의지적 신앙을 보여준다면 오늘 시편 73편은 생각하는 믿음, 고민하는 믿음, 지성적인 믿음, 어떤 감정의 상태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속에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역사와 삶의 현장을 보면서 악인의 종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역사를 읽어야 된다. 특별히 성경의 역사를 읽어야 된다. 사회의 베스트셀러는 나오는대로 사보면서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는 절대 보지 않는 분들이 있다. 여러분 성경 이 말씀에 나오는 역사의 진리를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찬송가다. 합본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깨달음을 얻고 성경에서 얻은 찬송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된다. 그것이 영성의 최고다. 그가 깨달은 것은 왜 악인에게 형통하시는가? 이 분이 시에는 다 고백하지 않았지만 5가지정도로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악인의 형통을 일시적으로 허락하신다면 죄가 얼마나 무섭고 죄가 죄됨을 드러나게 하신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악인들이 악한 상실한 마음을 내버려두셨다. 사람들은 죄의 결과를 경험하지 않고 죄의 즐거움만을 취하려 한다. 죄가 고통이 없다면 죄 가운데 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그 죄가 얼마나 추악하고 끔찍한 것인가를 드러내게 하신다. 2. 하나님은 악인을 형통하게 내버려 두심으로 그 악인의 멸망을 더욱더 철저하고 확실하게 드러내신다. 여러분 원수가 때로는 승리하는 것 같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 같지만 그들이 최고봉에 돌아설 때 그들이 무너진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더 영광 받으시겠어요.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백성들에게 아주 멋진 옷을 입고 연설하니까 ‘아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다.’ 이것으로 헤롯을 막 높이고, 추앙한다. 하나님이 그 때 헤롯을 치셨다. 그가 자신을 높이고 그가 우상화 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하는 순간,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위치에 사람을 둘 때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하는 영광을 사람에게 돌릴 때 위험한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시키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은 연단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나니, 시편 아삽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죠. “내 마음이 정결하고, 내 손을 깨끗하게 씻어, 무죄하다는 것이 실로 헛되도다. 과연 그가 깨끗할까요?” 이 세상에 고통이 필요 없는 선인이 있을까요? 자신은 스스로 착하다 여기지만 진짜 착한 것일까요? 연단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연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의인은 아무도 없다. 왜 의인은 고통당할까?’를 묻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멀쩡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연단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성경에 욥이 나온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자랑하실만한 의인이라고 한다. 그가 고통당한다. “내가 왜 고통당해야 합니까?”하는 그런 의문이 일어나죠. 그래서 이유 없는 고난당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해석을 틀린 것이다. 욥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잘못 해석 한 것이다.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세상 당대에 가장 의인이라는 욥도 회개할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욥도 고난을 통해서 연단 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면,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은 욥에 비해 형편없지 않나요.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연단을 받아야겠느냐. 이것이 더 정확한 욥기에 해석이다. 욥도 그렇게 고난 이유 없이 고난 받았는데, 나도 이렇게 이유 없이 고난을 받아야지. 라는 것은 정확하지 못한 해석이다. 그러면 더 자신의 합리화하고 하나님을 더 원망하게 된다. 4. 하나님은 이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악을 막고 계신다. 여러분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저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형통이 더 저주일 수 있다. 더 빨리 멸망하는 길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과 연단 속에서 나를 축복하지 않는 것 같고, 나와 함께하지 않는 것 같다는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이 고통과 악이 있습니까?” 이렇게 한탄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이정도인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이정도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악을 통치하지 않으시면 이 세상은 곧바로 지옥이 되어 버릴 것이다. 5. 결코 악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최종적인 고백을 가지고 계신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것 같지만, 깨신다. 그리고 그들을 멸시하고, 그들을 진멸할 것이다. 악을 완전히 제거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은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멸망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언젠가 멸시하실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1-2절에선 실족하고 미끄 러 질 뻔했던 것들이 정확한 고백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21-22절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어떤 양심에 찔렸나, 내가 다 알지도 못한 말을 가지고, 진리의 한 가닥만 가지고 모든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하나님께 상처받았다고 말했구나. 그 진리를 깨달으니, 하나님께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나 자신이었음을 알았다. 하나님이 나를 상처준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상처준 것이구나. 모든 내 고통의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내 자신의 우매함, 자신을 이렇게 비유한다. 나는 짐승과도 같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자기가 받은 시련을 자기 자신에게 갇혀서 자신이 마치 희생양인 것처럼 자기를 크게 만들고, 자기를 보호함으로 자기를 본능으로 확대해서 해석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에서 행하시는 일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상처 받았다, 실족했다, 시험받았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을 나는 우매무지한 짐승이다고 고백했다. 짐승의 특징은 훈련받는 것을 싫어한다. 내 안에 영적으로 훈련받는 것을 싫어했다. 하나님이 고통을 통해 나를 연단시키시고, 정금같이 나오시게 하려는 사랑의 연단이라는 것을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악인의 형통과 비교하면서 악인이 형통하는 것이 질투하며 부러워하면서 … 이런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 저는 짐승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미워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을 깨닫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고백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있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이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뜻이다.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한 우매 무지한 짐승이었으나 내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붙드심의 은혜, 성소에 나가는 것도 은혜요, 깨닫게 하신 것도 은혜다. 고통의 이유를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은혜요,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깨닫게 한 것도 은혜다. 역사의 중요한 하나님의 법칙을 깊이 깨닫게 하심도 은혜라고 붙들어주셨다, 인도해주셨다, 나를 영접해주셨다는 은혜를 경험한 것이다. 주의 교훈으로 깨닫게 해주신 것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73편 마지막도 찬양으로 끝난다.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대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이 세상 속에 상처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기대했던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것을 주셔야되는데 하나님이 주시지만, 이것은 하나님 외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사모한 것이다. 그래서 상처받는 것이다. 이 세상 속 믿음이 견고함으로 하나님 앞에 상처받았다고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사모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고 실족하지 않는 것이다. 실족을 많이 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기대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뒤집어 설명하면 주 밖에 사모할 것이 없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연단을 통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처럼 나갈 때 개인의 고난과 인생의 여러 시련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상처받았단 말 하지 않고 상처는 자신을 주는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겸손히 찬양할 줄로 믿는다. 우리의 입술에서 하나님께 상처받았다는 말이 사라지기를 축원한다. 하나님 앞에는 상처받았다는 말이 아닌, 나의 믿음이 없어서이고 내가 깨달은 작은 한가지 진리로 모든 것을 깨달은 것처럼 교만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주밖에 사모할자 없다. 그런 고백으로 나갈 때 승리하게 될 줄로 믿는다.
작성자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