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네 마음속의 무덤에서 떨치고 나와라!”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조토 디 본도네 ‘나사로의 부활’과 묵상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나사로의 부활’(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 소재)>

 
기독교는 기독(基督; 그리스도의 음역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빌려 태어났다.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0여년의 생애를 인간 세상에 머물다 가셨다. 따라서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분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은 아예 성립되지 못한다. 
인간 이성의 영역과 신의 기적의 영역은 애당초 차원이 다르다. 이런 까닭에 어떻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고, 처녀의 몸을 빌려 태어났고, 또 어찌 죽음에서 부활하셨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라는 소리만큼 어리석은 말도 없다.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가 아무리 눈부시다 해도 이성 너머 신비로운 초월적 영역에 속하는 일을 이성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오늘 묵상할 성경본문(요한복음 11:1~44)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나사로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 나사로의 부활 스토리는 두치오, 고흐, 렘브란트, 카라바조 등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다. 그 중에서 우리가 살펴볼 그림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년)가 그린 ‘나사로의 부활’(1304~1306년)이다. 조토는 종래의 평면적인 비잔틴 전통을 탈피해서 공간감, 입체감을 가진 르네상스 미술의 신기원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의 이 그림은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에 남아있는 프레스코 벽화이다. 이 예배당은 당시 파도바의 통치자였던 스크로베니가 고리대금업으로 악명 높았던 자신의 부친을 대신하여 속죄하는 뜻에서 세워졌기 때문에 ‘스크로베니 경당’이라고 불린다. 이 경당에는 조토의 수많은 그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나사로야! 이리 나와라!” 
 
오늘의 주인공 나사로는 유대 베다니 지역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던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오빠이기도 하다. 그만큼 삼남매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예수님도 그들을 친구처럼 격의 없이 사랑해주셨던 것 같다. 자매는 오라비 나사로가 크게 병들자 예수님께 치료를 요청한다.
“주여,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리를 들으시고도 베다니를 향해 길을 재촉하지 않으신다. 대신 얼핏 알아듣기 힘든 말씀을 하신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제자들도 유대지방 사람들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등 박해를 받았던 기억 때문에 베다니행을 말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신다. 
“낮은 12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다니는 사람은 이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기 때문에 넘어진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해보니 나사로는 매장된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때였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마르다는 달려 나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마리아는 슬픔에 빠져 집에 남아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원망했다.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시켜 마리아를 부르신다. 달려온 마리아 역시 마르다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원망한다. 예수님은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어찌 나사로는 죽게 내버려뒀단 말이오?”라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도 오라비를 잃고 비탄에 빠진 그들을 보고 함께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무덤의 돌을 치우게 하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나사로야! 이리 나와라!”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나왔다. 그의 손발은 물론 얼굴까지 온통 천으로 칭칭 감겨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사로를 풀어주어 다닐 수 있게 하라!”
이제 조토의 그림을 한번 보자. 그림 왼쪽에 근엄한 표정으로 나사로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 그를 축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의 함께 모은 두 번째, 세 번째 손가락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머지 세 손가락은 신성을 상징한다. 후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뒤에 그려진 인물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일 것이다. 
오른쪽 동굴 속 돌무덤에서 밖으로 나온 나사로의 모습이 보인다. 나사로가 전신이 하얀 천으로 칭칭 둘러싸여 묶인 채 걸어 나온다. 이미 죽은 지 며칠이 지났음을 반영한 듯 나사로의 얼굴이 창백하다. 천으로 두르고 묶인 나사로의 모습은 감옥 안의 죄수처럼 결박당한 채로 자율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상징한다. 
 
진정으로 부활하는 길
“깨어나라, 나와라, 거하라”
 
동굴과 무덤은 동의어이다. 이중적인 상징이 있다. 생(生)과 사(死), 죽음과 생명(부활)이 공존하는 곳이다. 무덤 혹은 동굴은 죽은 시체를 묻는 어둠의 장소인 동시에 부활이 이루어지는 빛의 장소이기도 하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곳도 엄밀하게는 동굴이다.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바위 동굴을 파서 구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처형당하고 묻히신 곳도 동굴 속에 판 무덤에 큰 돌을 굴려 막은 곳이었다.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이리로 나와라” 선포하시고, 그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하신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꽁꽁 결박당한 우리에게 나사로처럼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자유를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인류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에게 아니 심리적으로 죽은 시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제2의 창조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나사로의 머리 위, 도저히 생명이 살지 못할 것 같은 돌무덤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조토는 이 나무를 이미 죽은 시체를 살려내시는, 능치 못할 것이 없으신 주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나사로의 손을 잡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사로가 부활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이는 이는 아마도 가장 외향적이고 저돌적인 제자 베드로가 아닐까 싶다. 오른쪽 하단에 돌무덤의 뚜껑을 치우는 시종들 왼쪽에, 예수님 발아래 함께 엎드려 예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이들이 바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오빠 나사로를 구해주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한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지만,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 회개하고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것이다. 
융심리학자 안셀름 그륀은 신앙을 “무덤에서 일어나는 일, 환상의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부활은 “의식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일, 묶임과 가면 없이 열린 눈으로 사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조토 디 본도네와 사도 요한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타율과 타성의 잠에서 깨어나라. 네 마음속의 무덤에서 떨치고 일어나 밖으로 힘차게 나와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그게 바로 네가 진정으로 부활하는 길이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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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