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고찰
전문가 기고
크리스천과 재정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현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아니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의 크리스천 3명 중 1명은 십일조를 낸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8명 중에 1명만 십일조를 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십일조 생활을 하는 비율이 더욱 줄어들고 있었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한국 교회 역시 비슷한 비율로 십일조를 드릴 거라 보인다.
십일조의 의미는 ‘열 번째 부분’이라는 뜻이다. 한 달에 100만 원을 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십일조는 10만 원이 되는 것이다. 1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한 달에 5만 원을 헌금하면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고 하면 일단 그 사람의 신앙을 떠나서 용어를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것이 된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그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 3장 말씀에 의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 사람은 당신에게 돈을 돌려 달라고 할 것이다. 법인 자금을 직원이 가지고 있으면 자칫 잘못하다간 횡령에 해당될 수도 있다. 십일조는 오늘날 세금을 납부하는 것처럼 내도 되고 안 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던 순종의 행위로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
십일조는 우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했을 것이고, 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와 자발적인 헌금을 통해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실제로 40년 광야생활 동안 체험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우상숭배로 인해 타락했고, 이는 말라기 3장에 언급한 것처럼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 말씀에 다음과 같이 명하신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구절 외에는 없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하시면서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우리에게 복을 부어주어서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차고도 넘치도록 부어주는지 부어주지 않는지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던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도 아니고 풍족할 때였으니 돈이 없어서 십일조를 하지 못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을 때였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과소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신기하게만큼 일이 더 잘 안되고, 수입은 오히려 줄어들고, 원하지 않는 지출들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기도원에 가서 혼자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셨던 말씀이 앞에서 언급한 말라기 3장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우상숭배로 인해 타락했고, 이는 말라기 3장에 언급한 것처럼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 말씀에 다음과 같이 명하신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당신을 시험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 구절 외에는 없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하시면서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우리에게 복을 부어주어서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차고도 넘치도록 부어주는지 부어주지 않는지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던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도 아니고 풍족할 때였으니 돈이 없어서 십일조를 하지 못했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을 때였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과소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때, 신기하게만큼 일이 더 잘 안되고, 수입은 오히려 줄어들고, 원하지 않는 지출들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기도원에 가서 혼자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셨던 말씀이 앞에서 언급한 말라기 3장 말씀이었다.
주의 백성이 여호와께 ‘기쁨의 드림’
이러한 십일조의 속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구약성경이 따분하고 의무로 가득 찬 율법주의를 가르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드리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 36:4~7).
모세가 예물을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하기 전까지 그들은 열정적으로 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구약의 모든 헌금과 드림이 신약성경의 연보와 달리 십일조에 국한되어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십일조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자발적 드림을 하고 있었다. 이런 기쁨의 드림은 다윗의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 29:14, 16~18).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을 뿐 아니라 주의 백성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했다. 가령, 여러분이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신앙교육을 했다고 해보자. 그렇게 용돈을 받아 든 자녀가 그 용돈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감사하면서 즐거이 십일조를 드리고, 어떨 때는 십일조 이상으로 용돈에서 따로 떼어서 어려운 친구를 위해 돕는다고 하면 부모인 우리의 마음이 어떨까? 아마도 너무나도 대견해서 다음 용돈을 줄 때 더 주고 싶지 않을까? 반대로 용돈을 줬는데 장난감과 필요한 것을 살 생각에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는 고사하고 아무런 헌금도 드리지 않는다면 부모의 마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중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모세가 명령을 내리매… 남녀를 막론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그치니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 36:4~7).
모세가 예물을 그만 가져오라고 명령하기 전까지 그들은 열정적으로 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구약의 모든 헌금과 드림이 신약성경의 연보와 달리 십일조에 국한되어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십일조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자발적 드림을 하고 있었다. 이런 기쁨의 드림은 다윗의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 29:14, 16~18).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즐거이 드렸을 뿐 아니라 주의 백성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했다. 가령, 여러분이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신앙교육을 했다고 해보자. 그렇게 용돈을 받아 든 자녀가 그 용돈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감사하면서 즐거이 십일조를 드리고, 어떨 때는 십일조 이상으로 용돈에서 따로 떼어서 어려운 친구를 위해 돕는다고 하면 부모인 우리의 마음이 어떨까? 아마도 너무나도 대견해서 다음 용돈을 줄 때 더 주고 싶지 않을까? 반대로 용돈을 줬는데 장난감과 필요한 것을 살 생각에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는 고사하고 아무런 헌금도 드리지 않는다면 부모의 마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십일조, ‘내로남불’ 신앙 되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읽고 어떤 사람들은 불편한 생각이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율법주의를 언급하면서 구약에 나와 있는 십일조라는 율법을 지금 시대에 강요받는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제사들을 지금은 더 이상 드리지 않는데, 왜 구약에서 드려졌던 십일조 생활을 지금도 지켜야 하느냐는 것이 대표적인 반대주장이다. 제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명시적으로 신약성경에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십일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드려지지 않아도 된다는 구절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단 한 구절도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강조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정의와 긍휼, 믿음이고 ‘저것’은 십일조이다. 무엇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크리스천들의 내면에 십일조를 드리고 싶지 않은데 그에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십일조 생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기꺼이 드리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논쟁하는 경향이 있다. 더 이상 십일조가 내가 안 내면 은혜, 남이 안 내면 율법을 들이대는 ‘내로남불’ 신앙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십일조가 없어도 모든 부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우리의 물질에 앞서 마음을 받길 원하신다. 그런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 이주호 팀장(결혼예비학교 재정강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정의와 긍휼, 믿음이고 ‘저것’은 십일조이다. 무엇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크리스천들의 내면에 십일조를 드리고 싶지 않은데 그에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십일조 생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기꺼이 드리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논쟁하는 경향이 있다. 더 이상 십일조가 내가 안 내면 은혜, 남이 안 내면 율법을 들이대는 ‘내로남불’ 신앙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십일조가 없어도 모든 부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우리의 물질에 앞서 마음을 받길 원하신다. 그런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 이주호 팀장(결혼예비학교 재정강사)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물질에 앞서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