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칼럼] 이스라엘과 '드보라학당'
권사칼럼
이스라엘과 ‘드보라학당’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다섯 살 되던 해 성당에 새로 생긴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언니가 “동생이 있는 사람은 성당 유치원에 보내라”는 선생님의 광고를 듣고 왔기 때문이다. 거기서 찬송가도 배우고 즐겁게 유치원을 다녔다. 그러다 교장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다른 도시로 전근 가시면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자녀 셋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였다.
어렸던 나는 엄마도 보고 싶고 친구도 없어서 외할머니를 귀찮게 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외래 종교라며 싫어하시던 외할머니는 귀찮게 구는 외손녀를 돌보는 일이 영 힘드셨는지 교회에 다니는 이웃 언니에게 나를 맡기셨다. 그렇게 내가 교회에 가게 됐다.
6.25 전쟁이 막 끝나가던 시절이었다. 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군용 텐트 바닥에 볏짚 가마니를 놓고 한 사람씩 앉아서 밤마다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곤 했다. 모두 기도하는 그 밤, 예배가 끝나면 언니는 잠든 나를 업고 밤길을 걸었다. 언니의 등 뒤에 업혀서 보았던 밤하늘의 별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유년 시절을 지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와 멀어졌다. 대학을 다니면서 힘든 공부와 어려운 현실에 지쳤던 나는 그 시골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가 생각났다.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어린 시절 시골교회에 모여 어른들이 부르던 찬양이 내 입술에 맴돌았다. 굳건한 반석 되신다는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 도 도저히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조건 믿으라는데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1989년 온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일대일제자양육을 비롯한 각종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 말씀이 너무 좋았다. 주일에 배운 말씀을 월요일 학교에 출근하면 동료 교사들에게 가르쳤다. 근무하던 학교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핍박도 따랐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예수께서 사셨던 그 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고 공부하며 이스라엘에 갔다. 처음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 그 벅찬 감정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감람산에 오르면 눈물 흘리신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그 아래 왕곡에서는 멜기세덕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는 양 떼를 치던 다윗을 만났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도 들었다. 가는 곳마다 성경의 사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이스라엘을 다녀오고 나서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교회에서 성경역사와 지리 공부반이 개설되었다. 3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하던 중에 지도 목사님께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다며 이스라엘로 떠나셨다. 우리 순식구들끼리 매주 모여서 3년 동안 나머지 부분을 공부했다. 그때 우리가 공부하던 교재를 두란노서원에서 <역사지리로 보는 성경>(이문범 저)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저자 목사님은 지금도 매월 <생명의 삶> 첫째 주에 ‘묵상을 돕는 배경산책’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하고 계신다.
그 책이 출간되고 마음이 맞는 권사님들과 매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카페에 모여 책을 읽고 나눴다. 배우면 금방 잊어버려도 즐겁게 공부하자는 뜻으로 ‘봉숭아학당’이라는 모임 이름을 지었다. 사사 드보라를 공부하면서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고자 ‘드보라학당’으로 개명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모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ZOOM)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 지경이 더욱 넓어졌다. 온누리교회는 물론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친구들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인도네시아에서도 참여하는 글로벌 학당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저자 목사님을 초빙해서 특강도 듣는다. 드보라학당은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 이순희 귄사(성북공동체)
어렸던 나는 엄마도 보고 싶고 친구도 없어서 외할머니를 귀찮게 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외래 종교라며 싫어하시던 외할머니는 귀찮게 구는 외손녀를 돌보는 일이 영 힘드셨는지 교회에 다니는 이웃 언니에게 나를 맡기셨다. 그렇게 내가 교회에 가게 됐다.
6.25 전쟁이 막 끝나가던 시절이었다. 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군용 텐트 바닥에 볏짚 가마니를 놓고 한 사람씩 앉아서 밤마다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곤 했다. 모두 기도하는 그 밤, 예배가 끝나면 언니는 잠든 나를 업고 밤길을 걸었다. 언니의 등 뒤에 업혀서 보았던 밤하늘의 별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유년 시절을 지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와 멀어졌다. 대학을 다니면서 힘든 공부와 어려운 현실에 지쳤던 나는 그 시골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가 생각났다.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어린 시절 시골교회에 모여 어른들이 부르던 찬양이 내 입술에 맴돌았다. 굳건한 반석 되신다는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 도 도저히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조건 믿으라는데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1989년 온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일대일제자양육을 비롯한 각종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 말씀이 너무 좋았다. 주일에 배운 말씀을 월요일 학교에 출근하면 동료 교사들에게 가르쳤다. 근무하던 학교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핍박도 따랐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예수께서 사셨던 그 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고 공부하며 이스라엘에 갔다. 처음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 그 벅찬 감정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감람산에 오르면 눈물 흘리신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그 아래 왕곡에서는 멜기세덕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는 양 떼를 치던 다윗을 만났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도 들었다. 가는 곳마다 성경의 사건들이 그대로 있었다.
이스라엘을 다녀오고 나서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교회에서 성경역사와 지리 공부반이 개설되었다. 3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하던 중에 지도 목사님께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다며 이스라엘로 떠나셨다. 우리 순식구들끼리 매주 모여서 3년 동안 나머지 부분을 공부했다. 그때 우리가 공부하던 교재를 두란노서원에서 <역사지리로 보는 성경>(이문범 저)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저자 목사님은 지금도 매월 <생명의 삶> 첫째 주에 ‘묵상을 돕는 배경산책’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하고 계신다.
그 책이 출간되고 마음이 맞는 권사님들과 매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카페에 모여 책을 읽고 나눴다. 배우면 금방 잊어버려도 즐겁게 공부하자는 뜻으로 ‘봉숭아학당’이라는 모임 이름을 지었다. 사사 드보라를 공부하면서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고자 ‘드보라학당’으로 개명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모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온라인(ZOOM)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 지경이 더욱 넓어졌다. 온누리교회는 물론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친구들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인도네시아에서도 참여하는 글로벌 학당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저자 목사님을 초빙해서 특강도 듣는다. 드보라학당은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만들어 낸 기적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 이순희 귄사(성북공동체)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