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떠나는 선교 여행] 오래된 교회에서 만난 하나님
목사와 떠나는 선교 여행
- 울릉도 ‘평리교회’
- 울릉도 ‘평리교회’
오래된 교회에서 만난 하나님
평리교회는 울릉도에서 만난 두 번째 교회다. 태하에서 현포를 지나는 울릉도 순환도로를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버스를 타고 평리정류장에서 내렸다. 앞서 서달교회에서의 혹독한 걷기에 몸과 마음이 단련되었나? 완만한 경사로가 감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평리교회로 가는 길은 ‘울릉천국’과 동일하다. 울릉도의 유명 관광지가 된 ‘울릉천국’의 입구가 평리교회라고 하면 될 것이다. 울릉천국은 가수 이장희 씨가 우연히 울릉도에 들렀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땅을 사고 밭을 일구며 정원을 가꾼 것으로 시작했다. 경상북도와 울릉군이 협력해서 아트센터를 짓고, 소전시장과 카페 등이 있다. 울릉도의 명소로 자리 잡는 중이다. 울릉천국의 첫 집인 이장희 씨 집이 평리교회 뒤편에 있다. 그리고 울릉천국 아트센터가 있고, 그 앞에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자연스레 평리교회는 울릉천국의 입구가 된다.
평리교회를 소개하려면 석포교회를 먼저 언급해야 한다. 석포교회의 설립자 최인회 감로의 순회전도로 평리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인회 감로가 평리의 강덕삼을 전도해서 그 가정에서 여러 명이 모여 예배드리면서 탄생한 교회가 평리교회다. 그때가 1910년 10월 20일이다. 이후 최인회 감로는 석포를 떠나 평리로 이주했고,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삼았다. 1933년 14평 목조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어엿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박해는 울릉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예배당이 철거당하고 교회는 해산되었다. 1942년 9월 교회를 섬기는 김해용 감로가 신사참배 거부로 총회지도자들과 함께 원산형무소에 투옥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해용 감로는 8개월 동안 형무소에서 감당할 수 없는 폭행과 고문을 당했고, 석방 이후에도 구타와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날들을 겨우 보내다 1947년 8월 13일 평리에서 생을 마쳤다. 기독교 한국침례회총회는 김해용 감로를 순교자로 명명하고 2009년 순교기념비를 교회 입구에 세워두었다.
박해 때문에 교회는 숨소리를 감추며 살아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해방되자 다시 한 가정집에 모여 다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 역사를 이어나갔다. 이때 성도들은 설립자와 순교자의 가족, 자녀들이 중심이었다. 1946년 목조로 된 초가를 매입해서 수리해 예배 처소로 삼았다. 1948년 목조건물에 너와로 지붕을 한 예배당을 준공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면서 물산의 풍부함을 자랑하는 평리지역의 호황은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때 200여 명의 성도와 주일학교는 물론이고, 청년부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회였다. 무엇보다 20명 넘는 목회자를 배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세우는 교회로 그 이름이 나던 때가 있었다.
지금 평리교회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토지를 그대로 이어가며 성실한 삶을 살아내는 고령의 성도들만 남아있는 듯하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어쩌면 쓸쓸함만 있는 듯한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그냥 스치듯 살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연로한 성도님들이 복음 안에서 평온하며, 생의 마지막까지 말씀을 좇아 성숙한 삶을 살도록 목회적 돌봄을 감당하는 김형갑 목사님 내외분의 따뜻함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예배당 입구에서 만나는 정돈되고 잘 가꿔진 작은 정원을 보았고, 오래된 창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예배당 의자들이 가지런히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얼만큼의 수고와 애씀이 살아 숨 쉬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래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펼쳐놓은 열심과 수고를 마주한다. 은혜를 맛보고, 오늘의 내 일상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받는다. 바로 이것이 내가 계속 오래된 교회를 찾는 이유다.
/ 이세영 목사(대전온누리교회)
평리교회로 가는 길은 ‘울릉천국’과 동일하다. 울릉도의 유명 관광지가 된 ‘울릉천국’의 입구가 평리교회라고 하면 될 것이다. 울릉천국은 가수 이장희 씨가 우연히 울릉도에 들렀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땅을 사고 밭을 일구며 정원을 가꾼 것으로 시작했다. 경상북도와 울릉군이 협력해서 아트센터를 짓고, 소전시장과 카페 등이 있다. 울릉도의 명소로 자리 잡는 중이다. 울릉천국의 첫 집인 이장희 씨 집이 평리교회 뒤편에 있다. 그리고 울릉천국 아트센터가 있고, 그 앞에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자연스레 평리교회는 울릉천국의 입구가 된다.
평리교회를 소개하려면 석포교회를 먼저 언급해야 한다. 석포교회의 설립자 최인회 감로의 순회전도로 평리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인회 감로가 평리의 강덕삼을 전도해서 그 가정에서 여러 명이 모여 예배드리면서 탄생한 교회가 평리교회다. 그때가 1910년 10월 20일이다. 이후 최인회 감로는 석포를 떠나 평리로 이주했고,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삼았다. 1933년 14평 목조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어엿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박해는 울릉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예배당이 철거당하고 교회는 해산되었다. 1942년 9월 교회를 섬기는 김해용 감로가 신사참배 거부로 총회지도자들과 함께 원산형무소에 투옥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김해용 감로는 8개월 동안 형무소에서 감당할 수 없는 폭행과 고문을 당했고, 석방 이후에도 구타와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날들을 겨우 보내다 1947년 8월 13일 평리에서 생을 마쳤다. 기독교 한국침례회총회는 김해용 감로를 순교자로 명명하고 2009년 순교기념비를 교회 입구에 세워두었다.
박해 때문에 교회는 숨소리를 감추며 살아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해방되자 다시 한 가정집에 모여 다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 역사를 이어나갔다. 이때 성도들은 설립자와 순교자의 가족, 자녀들이 중심이었다. 1946년 목조로 된 초가를 매입해서 수리해 예배 처소로 삼았다. 1948년 목조건물에 너와로 지붕을 한 예배당을 준공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면서 물산의 풍부함을 자랑하는 평리지역의 호황은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때 200여 명의 성도와 주일학교는 물론이고, 청년부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교회였다. 무엇보다 20명 넘는 목회자를 배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세우는 교회로 그 이름이 나던 때가 있었다.
지금 평리교회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토지를 그대로 이어가며 성실한 삶을 살아내는 고령의 성도들만 남아있는 듯하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어쩌면 쓸쓸함만 있는 듯한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그냥 스치듯 살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연로한 성도님들이 복음 안에서 평온하며, 생의 마지막까지 말씀을 좇아 성숙한 삶을 살도록 목회적 돌봄을 감당하는 김형갑 목사님 내외분의 따뜻함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예배당 입구에서 만나는 정돈되고 잘 가꿔진 작은 정원을 보았고, 오래된 창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예배당 의자들이 가지런히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얼만큼의 수고와 애씀이 살아 숨 쉬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증거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래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펼쳐놓은 열심과 수고를 마주한다. 은혜를 맛보고, 오늘의 내 일상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받는다. 바로 이것이 내가 계속 오래된 교회를 찾는 이유다.
/ 이세영 목사(대전온누리교회)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