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신앙에세이] 무가치에서 가치로

신앙에세이
 
무가치에서 가치로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작은 사각형 안의 색과 형태가 전달하는 감정과 가치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렇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 조그마한 영역이 한 사람을 나타내고, 제한된 공간 안에 한 사람의 깊은 삶의 고민까지 담겨 있는 게 정말 신비하다. 톨스토이도 “유익하든 해가 되든 예술처럼 사람들이 어떤 것을 믿게 하는 강력한 수단은 없다”고 했을 정도로 그림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림은 공백에서 시작된다. 팔레트 위에 흩뿌려진 물감에는 어떠한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수많은 색이 존재한다 해도 마음은 없다. 화방에 가면 흰 캔버스가 널려 있지만, 길가의 돌멩이와 크게 다를 건 없다. 그러나 색이 붓에 담기고 하나의 평면에 칠해지면 숨을 얻는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공백이 채워지면 물질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창조성이 부여된다. 생명력을 갖춘 색이 캔버스에서 천천히 자리 잡기 시작한다. 캔버스에 갇히는 것은 색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유이자 존재하는 길이다. 캔버스에 펼쳐진 색채와 형태의 상호 필연적인 만남이 그림이 된다. 무가치에서 가치로 다시 태어난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은가? 이 땅에 흩뿌려진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팔레트 위에서 홀로 색을 품다가 굳어버리고 마는 헛되고 헛된 인생이다. 수많은 인생이 존재한다 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압도할 뿐이다. 제아무리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단 한 가지, 색이 그림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니고데모는 탁월한 색감의 소유자였다.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기관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로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이었다. 예수님도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칭하셨다. 눈에 띄는 존재감과 세상이 박수하는 돋보이는 색감이 선명하다. 그러나 한 개인의 역량은 중요하지 않다. 니고데모는 변화의 가능성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태어나는 존재의 격변을 생각지도 못하는 그는 굳어버린 물감일 뿐이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물감이 붓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림이 될 수 없다. 의미 없던 색이 붓을 만나 그림으로 변하는 것처럼, 성령님을 만날 때 우리는 전인격적으로 바뀐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백성이 된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진리를 품게 된다. 성령님께 붙들릴 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적 변화가 시작된다. 그것 말고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다른 방법이 없다.
때로 세상의 가르침을 보면 스스로 주문을 외우게 하는 것 같다. ‘너는 할 수 있다, 노력하면 가능해, 꾸준히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가꿔라’ 도대체 날개가 없는데 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얇은 종이에게 찢어지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해준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날까? 빛은 외부로부터 온다. 인간의 내부에는 그 어떤 발광의 근원도 없다.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낯선 의가 필요하다. 위로부터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참된 인생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에 든 붓으로 ‘나’라는 색깔을 담아 사용하실 때 모든 것이 의미를 찾게 된다. 무가치한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가 채우게 될 그림은 복음으로 가득 찬 하나님 나라다. 우리가 어떤 색깔, 어떤 형태의 그림이 될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화가에게 의미 없는 색은 없다.
/ 최종현 목사(허브대학부)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