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읽는 성경]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 ‘열 처녀 비유’
전문가 기고
명화로 읽는 성경
등불에 기름을 채우고, 늘 깨어 있으라!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 ‘열 처녀 비유’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 ‘열 처녀 비유’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가 그린 ‘열 처녀 비유’(161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던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눅 6:39).
딱 이 한 구절만 가지고 그림을 훌륭하게 그려낸 이가 있다. ‘소경의 비유’(1568년)를 그린 피테르 브뤼겔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그림은 6명의 시각장애인이 들고 있는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걷다가 어떤 이는 휘청거리고, 어떤 이는 넘어지는 모습을 풍속화처럼 재치있게 잘 그려냈다. 이 비유에서 눈먼 사람은 육체적인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장애인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일 것이다. 삼손은 들릴라의 계략에 빠져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을 팔아넘기고, 삼손은 그들에 의해 눈이 뽑혀 시각장애인이 된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삼손이 비로소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돌이킨 삼손의 마음을 보셨다. 그에게 다시 옛날의 힘을 돌려준다. 육체적 시력이 살아있다고 영적인 시력까지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삼손의 이야기가 잘 보여준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 44:18).
마음이 깨어 있으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마음이 깨어 있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로마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데리고 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예수님의 절절한 당부도 소용없었다. 예수님이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잠에 취해 있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겠느냐?”(막 14:37).
제자들은 마음이 깨어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해도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처녀들 VS 슬기로운 처녀들
깨어 있어야 할 때 깨어 있지 못하고 잠이 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아니다. 마태복음 25장 전반부(1~13절)에서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처녀들이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모두 졸다가 잠들어버린다.
오늘 본문 말씀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의 ‘열 처녀 비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때 하늘나라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명의 처녀와 같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 명은 어리석었고 다섯 명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져왔지만 기름은 챙기지 않았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왔다.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어버렸다”(마 25:1~5).
프란켄 2세는 바로 이 장면을 포착했다. 그림 왼쪽을 보자.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모습이 상세하다. 그들은 신랑을 영접하는 경건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신부로서의 신분을 완전히 망각했다. 딴짓에 얼이 빠져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포도주 마시느라 정신없는 여인, 아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여인도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발밑에는 술병과 깨진 잔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주사위와 카드, 무도회에서 썼을 가면도 나뒹굴고 있다. 그들의 위쪽에 걸린 벽화에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소품은 일관되게 본분을 잊고 무절제와 방탕으로 흥청망청하는 어리석은 여인들을 상징한다.
반면 오른쪽에 있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은 왼쪽의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복장은 단정하고 검소하다. 오른쪽 벽에는 수난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다. 한 여인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모여있는 테이블 위에는 성경책과 십자가상이 있다. 맨 오른쪽 여인은 무릎에 성경책을 놓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가운데 있는 여인은 정성스레 등잔에 기름을 채운다. 또 한 여인은 차분하게 바느질을 하고 있고, 그 뒤쪽의 여인은 보석함을 열고 있다. 아마도 이 처녀는 그녀가 가진 소유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할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테이블 아래에는 기름을 넣어 불을 붙인 등잔이 놓여있다. 특이한 것은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슬기로운 처녀들의 그것에 비해 뚜렷하게 많다. 아마도 화가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모습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으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오늘 본문 말씀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의 ‘열 처녀 비유’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그때 하늘나라는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명의 처녀와 같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 명은 어리석었고 다섯 명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져왔지만 기름은 챙기지 않았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왔다.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어버렸다”(마 25:1~5).
프란켄 2세는 바로 이 장면을 포착했다. 그림 왼쪽을 보자.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모습이 상세하다. 그들은 신랑을 영접하는 경건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신부로서의 신분을 완전히 망각했다. 딴짓에 얼이 빠져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 포도주 마시느라 정신없는 여인, 아예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여인도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발밑에는 술병과 깨진 잔 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주사위와 카드, 무도회에서 썼을 가면도 나뒹굴고 있다. 그들의 위쪽에 걸린 벽화에는 벌거벗은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왼쪽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소품은 일관되게 본분을 잊고 무절제와 방탕으로 흥청망청하는 어리석은 여인들을 상징한다.
반면 오른쪽에 있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은 왼쪽의 어리석은 처녀의 모습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복장은 단정하고 검소하다. 오른쪽 벽에는 수난을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다. 한 여인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모여있는 테이블 위에는 성경책과 십자가상이 있다. 맨 오른쪽 여인은 무릎에 성경책을 놓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가운데 있는 여인은 정성스레 등잔에 기름을 채운다. 또 한 여인은 차분하게 바느질을 하고 있고, 그 뒤쪽의 여인은 보석함을 열고 있다. 아마도 이 처녀는 그녀가 가진 소유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할 것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테이블 아래에는 기름을 넣어 불을 붙인 등잔이 놓여있다. 특이한 것은 어리석은 처녀들의 모습이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슬기로운 처녀들의 그것에 비해 뚜렷하게 많다. 아마도 화가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모습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교훈으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생명도, 성령도 자기 것을 준비해야지,
남의 것을 빌려 쓸 수 없다!
남의 것을 빌려 쓸 수 없다!
“한밤중에 갑자기 ‘신랑이 온다! 어서 나와서 신랑을 맞으라!’하는 소리가 들렸다”(마 25:6).
그림 정중앙에 현악기를 켜고 있는 여인의 뒤쪽에 신랑 일행이 올 숲속의 길이 묘사되어 있다. 열 처녀 모두 일어나서 제각기 등불을 손질하였다. 그러나 본질을 망각하고 흥청망청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의 도착이 늦어진 줄 모르고 기름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데 기름을 좀 나눠다오’하고 부탁했다”(마 25:8).
슬기로운 처녀들은 단호했다.
“안 된다. 너희와 우리가 같이 쓰기에는 그림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기름 장수에게 가서 너희가 쓸 기름을 좀 사라”(마 25:9).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름은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도 되고, 불을 붙여 빛이 나게 하는 연료도 된다.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아마도 사람의 생명도, 성령도 자기 자신의 것을 준비해야지, 남의 것을 빌려 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무런 생각 없이 대충 살면서 제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도착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 이제 혼인 잔치가 열릴 집의 문이 굳게 닫혔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뒤늦게 와서 애원했다.
“주여! 주여! 우리가 들어가게 문을 열어주십시오!”(마 25:11).
그림 중앙 맨 위, 저 멀리 원경(遠景)에 이 장면을 담았다. 잔칫집의 문이 이미 닫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잔칫집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도 한다. 오른쪽에 입성에 성공한 슬기로운 처녀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환호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왼쪽 닫힌 문 앞에서 애걸복걸하는 여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는 단 한 장의 그림에 그가 묵상한 마태복음 25장 전반부를 충실하게 그렸다.
예수님이 열 처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불을 켜고,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새신랑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깨어서 기다려야 한다. 특히 마음이 깨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도 깨어 있으라. 그 날짜와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25:13).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그림 정중앙에 현악기를 켜고 있는 여인의 뒤쪽에 신랑 일행이 올 숲속의 길이 묘사되어 있다. 열 처녀 모두 일어나서 제각기 등불을 손질하였다. 그러나 본질을 망각하고 흥청망청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의 도착이 늦어진 줄 모르고 기름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는데 기름을 좀 나눠다오’하고 부탁했다”(마 25:8).
슬기로운 처녀들은 단호했다.
“안 된다. 너희와 우리가 같이 쓰기에는 그림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기름 장수에게 가서 너희가 쓸 기름을 좀 사라”(마 25:9).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름은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도 되고, 불을 붙여 빛이 나게 하는 연료도 된다.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아마도 사람의 생명도, 성령도 자기 자신의 것을 준비해야지, 남의 것을 빌려 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무런 생각 없이 대충 살면서 제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도착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 이제 혼인 잔치가 열릴 집의 문이 굳게 닫혔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뒤늦게 와서 애원했다.
“주여! 주여! 우리가 들어가게 문을 열어주십시오!”(마 25:11).
그림 중앙 맨 위, 저 멀리 원경(遠景)에 이 장면을 담았다. 잔칫집의 문이 이미 닫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잔칫집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도 한다. 오른쪽에 입성에 성공한 슬기로운 처녀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환호성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왼쪽 닫힌 문 앞에서 애걸복걸하는 여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히에로니무스 프란켄 2세는 단 한 장의 그림에 그가 묵상한 마태복음 25장 전반부를 충실하게 그렸다.
예수님이 열 처녀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언제 도래할지,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불을 켜고,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새신랑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깨어서 기다려야 한다. 특히 마음이 깨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도 깨어 있으라. 그 날짜와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25:13).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고려대 인문예술과정 주임교수)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