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로대웨이드에서 돕스까지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

‘로대웨이드에서 돕스까지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
 
법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
미국 돕스 판결의 의의와 교회의 사명
 
대한민국은 2020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낙태죄 일부의 효력이 상실되어 입법 공백 상태에 놓여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명시된 형법 조항에 대하여 불합치 판결을 내린 배경이 된 미국 낙태 합법화 판결(로대웨이드 판결)이 지난 6월 말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이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교회와 크리스천의 사명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지난 8월 25일(목) 서빙고온누리교회 순형홀에서 바른여성선교회(대표 이기복 목사)가 주관하는 ‘생명을 살리는 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서 이상원 교수(전 총신대학교 교수, 바른인권여성연합 자문위원)가 ‘로대웨이드에서 돕스까지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을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편집자 주
 
2022년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돕스(Dobbs) vs 잭슨(Jackson)’ 판결문에서 미국 텍사스주 형법의 낙태금지 조항을 폐기한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Roe) vs 웨이드(Wade)’ 판결을 폐기하면서 판결 이유를 밝힌 장문의 글을 통하여 ‘Roe vs Wade’ 판결이 미국 사회에 끼친 폐해를 언급했다. 그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20세기 후반까지 미국법에는 낙태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73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주들의 3/4이 임산부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경우가 아닌 한 임신 전 기간에 걸쳐 시행되는 낙태를 범죄로 규정했다. 나머지 1/3이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긴 했으나 일정한 임신 기간에 대해서는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기도 했고, 낙태를 규제할 권한을 열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Roe vs Wade’ 판결은 낙태 문제에 대한 민주적 논의과정을 막아 버리고, 낙태권 폐기의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억압적인 체제를 전 미국민들을 향하여 강요했다. Roe vs Wade 판결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모든 주들의 형법을 괴멸시켰고,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격렬한 낙태죄 찬반 논쟁에 불을 붙였다.” 
‘Dobbs vs Jackson’ 판결문은 하나의 법 조항의 변화가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의 변동과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국민의 생각과 삶의 변동에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 하나의 법안이 바뀌었을 때 이른바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한두 줄 정도밖에 안 되는 법 조항 문구의 변화가 엄청난 사회 변동을 가져온다는 역사적 현실만으로도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법의 변화’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충분히 제시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바탕으로 세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인이 법의 변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 대응방법이다. 둘째, 미 대법원의 두 판결문이 생명의 시작점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기독교 생명윤리가 임신설 혹은 수정설의 입장을 견고하게 견지할 때 일관성 있는 논증을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째, 낙태처벌법 제정을 위한 정치 운동은 단지 법의 제정을 목표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과 교회의 기독교 생명윤리교육과 훈련을 위한 사회적 공간마련을 위해서도 필요한 전략임을 강조한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인간의 행동은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유형은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행하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집단의 결단에 따라서 행하는 행동이다.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행한 행동에 대하여 비판적인 반성을 하는 작업을 ‘개인윤리(personal ethics)’라 하고, 집단의 결단에 대하여 비판적인 반성을 하는 작업을 ‘사회윤리(social ethics)’라고 한다. 
개인의 결단에는 개인이 가진 내적인 자질, 덕성, 세계관, 사상, 감성 등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개인윤리는 덕의 윤리, 심성의 윤리, 세계관 등을 중시한다. 그러면 집단의 결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집단이 조화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 전체가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50명으로 구성된 학급에서 수업을 몇 시에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가정해보자. 50명을 모아 놓고 의견을 듣는다. 어떤 사람은 8시, 어떤 사람은 10시, 어떤 사람은 오후 2시를 제안한다. 의견을 다 들은 다음 가장 많은 구성원의 지원을 받은 시간이 10시임이 확인된다. 학급의 대표자는 “우리 학급의 수업은 10시에 시작한다”는 원칙을 선언한다. 이것이 집단의 결단이다. 이 원칙이 선언되고 나면 모든 학급원이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면 선이고, 이 원칙을 어기면 악이 된다. 이 원칙은 한 줄이지만 학급원 전체의 행동을 통제하는 힘을 발휘한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한 줄 결정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집단구성원 전체의 행동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때 집단의 결정이 올바른가, 구성원들은 집단의 결정에 따라 행동했는가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사회윤리’다. 집단의 결정을 ‘제도(institution)’라고 부른다. 제도는 구조라고 하기도 하고, 체제라고 하기도 하고, 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회윤리는 제도 혹은 법을 다루는 작업이다. 현행 제도 혹은 법이 바르게 만들어져 있는지 따지는 작업이 곧 사회윤리다.
19세기 말까지 기독교 윤리학의 비판적 반성 작업은 개인윤리의 영역에 제한되었다. 제도나 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므로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제도나 법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왕권신수설이 이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약 사상이 등장하면서 정치경제구조나 법이 시민들의 합의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등장했다. 19세기 말 기독교 사회사상가들은 제도나 법을 사람이 형성시킬 수 있다는 계약 사상의 타당성을 일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네덜란드의 기독교 사회사상가 흐룬 반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r)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다. 반 프린스터러는 자녀 양육권이 전적으로 부모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돈벌이를 위해 어린 자녀들을 노동에 내보내는 유아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법이 구조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인식하에 교육법 개정 운동에 나섰다. 카이퍼는 19세기 말 후기 산업혁명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구조적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사회구조에 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논증을 제시했다. 반 프린스터러와 카이퍼 논증의 핵심에는 사회구조나 법도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하나님 말씀의 빛에 비춰볼 때 바르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비판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반영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가 비례하는가?
 
전통적으로 기독교 윤리학이 견지해 오는 중요한 보편적 명제 가운데 하나는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이다(마 7:17).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행동이 나오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 명제는 또한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마음이 선하게 변하지 않은 사람이 아름다운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과 교회가 가지는 생각은 이렇다.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사회구조는 자동적으로 선한 구조로 바뀐다.” 
이 말의 의미는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거기에 비례해서 사회구조도 선한 구조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은 사회구조변혁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조건은 아니며, 마음이 변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과 정비례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서 2차 대전 당시 나치군에 징집된 독일 병사 대다수는 루터교인 아니면 가톨릭 교인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저 평범하고 착한 소시민들이었다.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학의 논리에 따르면 평범하고 착한 소시민들로 군대가 구성되었다면, 군대 자체도 선한 목적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치군은 유대인 600만 명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나치군은 이 악행을 양심의 가책 없이 수행했다. 일본군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당시 남경대학살과 위안부 사건에 참여했던 일본군 병사가 노인이 되어 네덜란드 TV 방송국에 나와서 인터뷰 한 일이 있다. 이 노인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이었다. 남경대학살과 위안부 사건에 어떤 마음으로 참여했는지를 물었더니 이 노인은 “당시에는 당연히 해야 할 국가의 의무로 알고 참여했고, 그 참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 일이 없으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답변했다. 다수의 착한 소시민들이 악을 추구하는 집단에 들어가서 이념화되면 순식간에 그 집단의 집단 악을 실행에 옮기는 행동대장 곧, ‘완장’들로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인이라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자신이 속한 정당이 집단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경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 정당의 집단신념에 종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변화된 개인들의 숫자가 증가해도 이에 정비례해서 사회구조가 선한 구조로 바꾸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때가 빈번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어질 글에서 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그 세 가지 이유는 모든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관련된 것들이다(계속).
/ 이상원 교수(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바른인권여성연합 자문위원) 

작성자  홍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