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로대웨이드에서 돕스까지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2] "생명의 시작점이 언제인가?

‘로대웨이드에서 돕스까지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
 
“생명의 시작점이 언제인가?”
임신 혹은 수정부터 살아있는 생명
 
대한민국은 2020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낙태죄 일부의 효력이 상실되어 입법 공백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가 명시된 형법 조항에 대하여 불합치 판결을 내린 배경이 된 미국 낙태 합법화 판결(로대웨이드 판결)이 지난 6월 말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이번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교회와 크리스천의 사명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지난 8월 25일(목) 서빙고온누리교회 순형홀에서 바른여성선교회(대표 이기복 목사)가 주관하는 ‘생명을 살리는 기도회’가 있었다. 이날 기도회에서 이상원 교수(전 총신대학교 교수, 바른인권여성연합 자문위원)가 ‘로대웨이드에서 돕스까지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의 역할’을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이번이 그 두 번째 순서다.
/ 편집자 주
 
변화된 개인들의 숫자가 증가해도 이에 정비례해서 사회구조가 선한 구조로 바뀌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인간은 마음의 힘으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노예제도의 폐지는 마음이 변화된 기독교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구조에 의해 마음이 바뀌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본질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예배형식, 규칙적인 예배 시간과 모임, 정해진 경건훈련 시간, 성례전 등을 통해서 마음이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이 구조를 바꾸는 힘과 구조가 마음을 바꾸는 힘 가운데 어느 힘이 더 강력할까? 구조가 마음을 바꾸는 힘이 월등하게 강력하다. 미국의 신정통주의 신학자이자 기독교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메카 디트로이트에서 13년 동안 ‘노사중재운동’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기독교사회윤리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아무리 선한 개인이라도 그가 속한 악한 집단과 싸우면 백전백패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선한 개인의 영향력이 누룩처럼 공동체에 스며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 영향력을 확장하기가 너무 힘겨운 반면에 구조악은 괴물과 같은 힘으로 선한 개인을 집어삼킨다. 
둘째, 개인의 결정은 개인의 생각만 바꾸면 바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의 결정을 바꾸려면 집단 구성원 전체를 다시 소집해 구성원들의 의사를 확인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매우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힘들다.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다시 모이는 것이 물리적으로 쉽지 않다. 다시 모인다고 해도 결정을 바꾸는 일에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할 지도 미지수다. 일단 결정하고 나면 그 결정의 수혜자들이 있기 마련이고, 수혜자들은 결정을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교단 총회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한 문장으로 된 결의를 했다고 하자. 이 결의가 잘못된 것임이 총회가 끝난 직후 발견되었지만 다음 해 총회가 열리기까지 이 한 문장으로 된 결의를 바꿀 수가 없다. 다음 해 총회가 열려도 회원들이 바꾸자는 의견에 동의할지도 미지수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구성원 전체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한 문장의 결의를 바꾸지 못한 채 몇 년 이상이 흘러가 버릴 수 있다. 
셋째, 개인의 행동이 주체가 되는 개인윤리의 영역과 제도와 법이 주체가 되는 사회윤리의 영역은 그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윤리의 영역에서 바른 행동의 규범적 표준과 사회윤리의 영역에서 바른 행동의 규범적 표준이 다르다. 통상적으로 개인윤리의 영역에서는 ‘인애의 원리’에 따라서 행하는 행동이 바르다고 평가받지만, 사회윤리의 영역에서는 ‘공정성의 원리’에 따라서 행하는 행동이 바르다고 평가받는다. ‘공(公)과 사(私)는 다르다.’ 따라서 개인윤리의 영역에 익숙한 행동관습을 가지고 사회윤리 영역에 들어가서 행동하면 사회윤리의 영역을 망가뜨리고, 역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가지 명제가 우리에게 동시에 필요하다. 마음이 변화된 선한 개인들이 있어야 궁극적으로 사회구조를 선한 구조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악한 구조가 선한 개인들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월등히 강력하다. 구조의 힘, 법의 힘이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개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과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개인의 마음이 완전히 변화된 후에야 비로소 구조변혁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종말의 날까지 구조변혁에 나서지 못한다. 종말의 날까지 마음이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구조가 바뀌고 난 후에 비로소 개인의 마음 변화에 착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종말의 날까지 마음의 변화에 착수할 수 없다. 종말의 날까지 사회구조는 결코 완전하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예배 참석하고, 경건훈련 하고, 이론 공부를 부지런히 하면서 동시에 구조와 법의 변혁을 위한 회의, 시위, 집회, 법 개정 노력, 항의, 기자회견 등에도 부지런히 참여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이 사실을 간파하고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경건 훈련에 힘쓰면서도 낙태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행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미국 프로라이프 정치운동의 초석을 놓았으며, 쉐퍼의 뜻을 이어받은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프로라이프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50년 동안 쌓은 내공에 힘입어 ‘Roe vs Wade’ 판결을 무효화시키는 ‘Dobbs vs Franklin’ 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다. 
 
두 판결 논쟁에서
생명 시작점이 차지하는 비중
 
텍사스주 형법, ‘Roe vs Wade’ 판결, 그리고 ‘Dobbs vs Jackson’ 판결을 읽어 보면 판결 정당화 논쟁이 생명의 시작점 문제를 축으로 나뉜 양 진영이 일보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 논쟁에서 밀리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텍사스주 형법은 임산부의 생명이 위기에 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임신 주수를 묻지 않고 모든 기간에 걸친 낙태를 살인죄로 규정하고 있는데, 임신 혹은 수정 순간부터 살아있는 인간 생명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Roe vs Wade’ 판결이 텍사스주 형법의 반헌법성을 공격할 때 바로 생명의 시작점 문제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Roe vs Wade’ 판결은 고대 희랍시대부터 중세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임신 혹은 수정 순간부터 태아를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는 것이 기독교계와 의료계에서 다수 의견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데 주력했다. ‘Dobbs vs Jackson’ 판결이 ‘Roe vs Wade’ 판결을 논박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이 판결이 명시적인 낙태 허용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임신 후 첫 3개월이 지난 시점이나 사실상 낙태 기준선으로 설정하고 있는 태동감지 시점이 모두 의학적으로 근거가 매우 희박한 기준선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태동을 감지하는 시점은 의학기술이 발달하면 얼마든지 앞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장박동시점도 마찬가지다. 심장박동시점을 5~6주로 보고 있지만, 이 시점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어서 의학기술이 발달하면 앞당겨질 수 있다. 
‘Dobbs vs Jackson’ 판결이 ‘Roe vs Wade’ 판결을 일관성 있게 그리고 강력하게 논증할 수 있었던 이유도 ‘Dobbs vs Jackson’ 판결이 인간의 생명은 임신 혹은 수정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전제 위에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Roe vs Wade’ 판결이 연방 헌법의 수정조항들이 낙태권에 대해 아무런 언명도 하지 않고 있다는 강력한 논증으로 비판할 수 있었고, 수정조항이 소위 사생활권에 대해서도 직접 언명하지 않고 있다고 일관성 있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Dobbs vs Jackson’ 판결 논증의 출발점이 임신설 혹은 수정설이었기 때문이다. 수정조항이 사람을 죽이는 권리를 자유권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대도 말이 안 되는 해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Dobbs vs Jackson’ 판결이 임신설이나 수정설 이외에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심장박동설을 인정하고 들어갔다면 ‘Roe vs Wade’ 판결을 일관성 있고 강력하게 비판할 수 없었을 것이며, 논증에 실패했을 것이다. 임신설 혹은 수정설 이외의 어떤 시점을 생명 시작점으로 잡는 순간 논리적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임신 시점이나 수정 시점 이외의 어느 시점도 의학적으로 일관성을 말할 수 없거나 말을 해도 근거가 극히 희박하거나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기준점이 흔들리면 논증 전체가 흔들린다. 그러나 임신 시점이나 수정 시점은 이론의 여지 없이 명료한 불연속점이어서 이 시점을 전제로 논증을 전개하면 일관성 있는 논증이 가능하고, 논증에 힘이 실린다. 이 점에서 ‘Dobbs vs Jackson’ 판결의 전략이 탁월했다(계속). 
/ 이상원 교수(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바른인권여성연합 자문위원) 

작성자  홍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