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기독문화재']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기독문화재’
보리울 무궁화에 담긴 신앙
남궁억 선생의 지칠 줄 몰랐던 민족계몽과 무궁화운동
남궁억 선생의 지칠 줄 몰랐던 민족계몽과 무궁화운동
강원도 홍천을 지나다 보면 ‘무궁화의 고장 홍천’이라는 표지를 볼 수 있다. ‘웬 무궁화? 홍천이?’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알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 교회 장로인 한서 남궁억 선생이 1918년 홍천군 서면 모곡(보리울)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했다.
남궁억 선생은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 영어학교인 동문학을 졸업했다. 선생의 첫 관직은 고종의 영어통역관이었다. 당시 민씨들이 관직을 사고팔았다. 뒤죽박죽 세상에서 선생은 꼿꼿한 선비적 기질을 내려놓지 않았다. 독립협회, 언론인, 목민관으로 활약하며 오직 나라를 위해 생을 바쳤다.
올곧은 선비가 설 땅이 좁았다. 나라에서는 그를 체포해 옥에 가두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식을 넣으면서 “억아, 절대로 굴복하지 마라!”고 용기를 주었다. 을사늑약, 경술국치 이후에는 교사로 활약하면서 민족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 곳이 교회였다. 남궁억 선생은 1910년 종교교회(사직동)에서 세례를 받았다.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윤치호의 권유가 있었다. 1912년에는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청년들에게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선생은 세례를 받은 지 5년 뒤 평신도가 목회자를 대신해 설교할 수 있는 ‘본처 전도사’ 직분을 받았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아서일까? 1918년 건강이 악화해 조상들이 살던 홍천 보리울로 낙향했다. 보리울은 제법 넓은 농경지를 가진 산골이다. 홍천은 산이 많기로 이름난 곳인데, 산 사이에 넓은 공간이 숨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선생은 모곡교회와 모곡서당을 세워 교육과 설교를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교회를 설립한다고 주민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렇지만 손 놓고 있을 선생이 아니었다. 젊은 청년들을 모아 문맹 개선에 나섰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동네 어른으로, 주일에는 목회자로 시간을 귀하게 썼다. 1922년에는 모곡학교를 개교하고 개화된 교육을 했다. 그의 가르침은 신앙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교육이었다.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 많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선생이 1922년에 지은 ‘일하러 가세’는 지금까지 애창되는 찬송가이다.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강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선생은 보리울 유리산에 조국광복기원제단을 쌓고 조국 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현재 한서초등학교 뒤편 유리산 기슭에 선생의 무덤이 있고, 뒷산을 조금 오르면 기도처가 있다. 선생은 교육, 노동뿐만 아니라 나라꽃 무궁화를 보급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일본이 벚꽃을 나라 곳곳에 심어 놓고 벚꽃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떠들고 다닐 때 우리는 무궁화 민족이라고 일갈했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무궁화의 나라라 불렸다. 여름 내내 피고 지고 또 피는 꽃처럼 민족이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1933년 남궁억 선생의 영향을 받은 홍천 일대 기독교인들이 결성한 비밀 단체가 ‘십자가당’이다. ‘공존공영의 지상천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십자가당이 남궁억 선생을 감시하고 있던 일제의 감시망에 걸렸다. 1935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남궁억 선생은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십자가당 결성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목표는 선생이었고, 이를 빌미로 선생이 추진하는 무궁화운동과 계몽운동을 탄압할 계획이었다.
70세 고령인 선생은 고문과 투옥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윤치호의 보증으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옥살이에 얻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결국 선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939년 4월 5일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어서도 민족의 거름이 되고자 했던 남궁억 선생은 진정한 민족지도자였다. 선생의 지칠 줄 몰랐던 민족계몽과 무궁화운동은 역동하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거름이 되었다. 보리울에는 한서초등학교, 유리산 기도처, 모곡예배당, 한서 남궁억 기념관, 무궁화동산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곳이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온누리교회, 문화해설사, <강화도(준엄한 배움의 길)> 저자)
남궁억 선생은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 영어학교인 동문학을 졸업했다. 선생의 첫 관직은 고종의 영어통역관이었다. 당시 민씨들이 관직을 사고팔았다. 뒤죽박죽 세상에서 선생은 꼿꼿한 선비적 기질을 내려놓지 않았다. 독립협회, 언론인, 목민관으로 활약하며 오직 나라를 위해 생을 바쳤다.
올곧은 선비가 설 땅이 좁았다. 나라에서는 그를 체포해 옥에 가두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식을 넣으면서 “억아, 절대로 굴복하지 마라!”고 용기를 주었다. 을사늑약, 경술국치 이후에는 교사로 활약하면서 민족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가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준 곳이 교회였다. 남궁억 선생은 1910년 종교교회(사직동)에서 세례를 받았다.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윤치호의 권유가 있었다. 1912년에는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청년들에게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선생은 세례를 받은 지 5년 뒤 평신도가 목회자를 대신해 설교할 수 있는 ‘본처 전도사’ 직분을 받았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아서일까? 1918년 건강이 악화해 조상들이 살던 홍천 보리울로 낙향했다. 보리울은 제법 넓은 농경지를 가진 산골이다. 홍천은 산이 많기로 이름난 곳인데, 산 사이에 넓은 공간이 숨어 있었다는 게 놀랍다. 선생은 모곡교회와 모곡서당을 세워 교육과 설교를 통한 민족계몽운동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교회를 설립한다고 주민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렇지만 손 놓고 있을 선생이 아니었다. 젊은 청년들을 모아 문맹 개선에 나섰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동네 어른으로, 주일에는 목회자로 시간을 귀하게 썼다. 1922년에는 모곡학교를 개교하고 개화된 교육을 했다. 그의 가르침은 신앙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교육이었다.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 많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선생이 1922년에 지은 ‘일하러 가세’는 지금까지 애창되는 찬송가이다.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강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선생은 보리울 유리산에 조국광복기원제단을 쌓고 조국 해방을 위해 기도했다. 현재 한서초등학교 뒤편 유리산 기슭에 선생의 무덤이 있고, 뒷산을 조금 오르면 기도처가 있다. 선생은 교육, 노동뿐만 아니라 나라꽃 무궁화를 보급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일본이 벚꽃을 나라 곳곳에 심어 놓고 벚꽃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떠들고 다닐 때 우리는 무궁화 민족이라고 일갈했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무궁화의 나라라 불렸다. 여름 내내 피고 지고 또 피는 꽃처럼 민족이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1933년 남궁억 선생의 영향을 받은 홍천 일대 기독교인들이 결성한 비밀 단체가 ‘십자가당’이다. ‘공존공영의 지상천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십자가당이 남궁억 선생을 감시하고 있던 일제의 감시망에 걸렸다. 1935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남궁억 선생은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십자가당 결성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의 목표는 선생이었고, 이를 빌미로 선생이 추진하는 무궁화운동과 계몽운동을 탄압할 계획이었다.
70세 고령인 선생은 고문과 투옥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윤치호의 보증으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옥살이에 얻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결국 선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939년 4월 5일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어서도 민족의 거름이 되고자 했던 남궁억 선생은 진정한 민족지도자였다. 선생의 지칠 줄 몰랐던 민족계몽과 무궁화운동은 역동하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거름이 되었다. 보리울에는 한서초등학교, 유리산 기도처, 모곡예배당, 한서 남궁억 기념관, 무궁화동산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곳이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온누리교회, 문화해설사, <강화도(준엄한 배움의 길)> 저자)
작성자 홍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