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에 함께하면 좋은 명화 그리고 음악
전문가 기고
부활절에 함께하면 좋은 명화 그리고 음악
부활절에 함께하면 좋은 명화 그리고 음악
“오직 예수께만 참되고 진실한 평화가 있나니”
카라바조 ‘엠마오의 저녁식사’, 비발디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카라바조 ‘엠마오의 저녁식사’, 비발디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부활주일이다. 부활절에 함께 하면 좋은 명화와 음악을 감상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카라바조가 그린 ‘엠마오의 저녁식사’와 비발디의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를 소개한다.
부활하신 예수님,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
시큰둥한 여관 주인
그림 속에 네 사람이 보인다. 식탁에 둘러앉은 예수님과 두 제자, 그리고 엠마오의 여관 주인이다. 두 제자는 엠마오로 걸어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 바로 그 제자들이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3~18).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처형과 부활 사건을 왜 당신은 모르냐고 힐난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 제자들은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제자와 깜짝 놀라 양팔을 벌리고 충격 받은 제자가 보인다. 그런데 이미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31).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 ‘엠마오의 저녁식사’는 바로크 시대 최고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작품이다. 제자들이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을 연극의 한 장면처럼 훌륭하게 포착했다. 그들의 놀라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한 사람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설 찰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의아한 표정이다. 덥수룩한 수염, 주름진 얼굴, 누더기 옷에서 알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 제자들의 당황이 엿보인다. 구원은 평범한 누구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암시다.
극적인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카라바조는 키아로스쿠로(명암의 대비)를 사용해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왼쪽에서 강한 빛이 예수님과 오른쪽 제자의 얼굴에 떨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엄지손가락을 허리띠에 집어넣고, 이 사건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여관 주인이다. 세상을 상징하는 이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도, 그들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삼일 후에 부활하신 것도 모른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4).
담담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평안하게 주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카라바조가 묘사한 예수님의 모습이 큰 화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을 그려온 방식과 다르게 수염 없고, 젊고, 깨끗하고, 후광이 없게 그렸기 때문이다. 과연 카라바조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생동감 넘치는 예수님을 그림으로써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한 제자들과는 달리 이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에게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서로 말하길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이 구절의 주석을 보면 단순히 “뜨겁지 아니하더냐” 정도가 아니라 “불타지 아니하더냐”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는 항상 격정적이다. 평온해 보여도 그 만남이 누구와의 만남이든지 모두 기적이다. 이날 저녁 식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고, 눈을 밝게 해주셨고, 마음에 불을 붙여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빛’이 바삭하게 다려진 것 같은 흰색 식탁보 위로 떨어지면서 식탁 위의 정물들을 놀랍도록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비추고 있다. 빵 두 쪽, 닭고기,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놓여 있는 과일바구니가 보인다. 바로 예수님이 음식을 축사하는 그 순간의 모습이다. 바구니의 그림자에 물고기 꼬리가 보인다. ‘익투스(ΙΧΘΥΣ, Ichthys)’,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카라바조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익투스를 숨겨놓음으로 이 그림이 그려진 17세기 기독교도에게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3~18).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처형과 부활 사건을 왜 당신은 모르냐고 힐난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 제자들은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제자와 깜짝 놀라 양팔을 벌리고 충격 받은 제자가 보인다. 그런데 이미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 24:31).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 ‘엠마오의 저녁식사’는 바로크 시대 최고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작품이다. 제자들이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을 연극의 한 장면처럼 훌륭하게 포착했다. 그들의 놀라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한 사람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설 찰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의아한 표정이다. 덥수룩한 수염, 주름진 얼굴, 누더기 옷에서 알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 제자들의 당황이 엿보인다. 구원은 평범한 누구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암시다.
극적인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카라바조는 키아로스쿠로(명암의 대비)를 사용해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왼쪽에서 강한 빛이 예수님과 오른쪽 제자의 얼굴에 떨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엄지손가락을 허리띠에 집어넣고, 이 사건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여관 주인이다. 세상을 상징하는 이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도, 그들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삼일 후에 부활하신 것도 모른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4).
담담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평안하게 주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 카라바조가 묘사한 예수님의 모습이 큰 화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을 그려온 방식과 다르게 수염 없고, 젊고, 깨끗하고, 후광이 없게 그렸기 때문이다. 과연 카라바조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생동감 넘치는 예수님을 그림으로써 예수님을 알아채지 못한 제자들과는 달리 이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에게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서로 말하길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이 구절의 주석을 보면 단순히 “뜨겁지 아니하더냐” 정도가 아니라 “불타지 아니하더냐”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는 항상 격정적이다. 평온해 보여도 그 만남이 누구와의 만남이든지 모두 기적이다. 이날 저녁 식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고, 눈을 밝게 해주셨고, 마음에 불을 붙여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빛’이 바삭하게 다려진 것 같은 흰색 식탁보 위로 떨어지면서 식탁 위의 정물들을 놀랍도록 상세하고 사실적으로 비추고 있다. 빵 두 쪽, 닭고기,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놓여 있는 과일바구니가 보인다. 바로 예수님이 음식을 축사하는 그 순간의 모습이다. 바구니의 그림자에 물고기 꼬리가 보인다. ‘익투스(ΙΧΘΥΣ, Ichthys)’,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카라바조는 초기 기독교 시대의 익투스를 숨겨놓음으로 이 그림이 그려진 17세기 기독교도에게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세상에는 없는 유일한 참 소망
부활절이 되면 늘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비발디의 모테트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undo pax sincera RV630)이다. 모테트(Motet)는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성악곡의 하나이다. 비발디의 모테트를 천상의 소리와 같은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Emma Kirkby)의 음성으로 들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나와 함께하셔서 그가 주시는 참 평안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비발디(A.Vivaldi)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사제였고, 작곡가였다. 오페라, 종교음악, 기악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작품을 남겼다.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는 영화 ‘샤인(Shine, 1996년)’의 주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테트는 가사 대부분 라틴어로 쓰인 종교적인 내용을 다루는 성악곡이다. 교회 전례와 연관성은 있지만 전례 음악의 핵심은 아니다. 이 곡은 작자 미상의 라틴어 종교시(詩)에 음악을 붙인 곡인데 바이올린 두 대, 비올라, 저음악기들로 반주하며 아리아-레시타티보-아리아-알렐루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아리아가 대표적인 곡이다. 첫 번째 아리아의 라틴어 가사 해석을 보면 이렇다.
비발디(A.Vivaldi)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사제였고, 작곡가였다. 오페라, 종교음악, 기악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작품을 남겼다.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는 영화 ‘샤인(Shine, 1996년)’의 주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테트는 가사 대부분 라틴어로 쓰인 종교적인 내용을 다루는 성악곡이다. 교회 전례와 연관성은 있지만 전례 음악의 핵심은 아니다. 이 곡은 작자 미상의 라틴어 종교시(詩)에 음악을 붙인 곡인데 바이올린 두 대, 비올라, 저음악기들로 반주하며 아리아-레시타티보-아리아-알렐루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아리아가 대표적인 곡이다. 첫 번째 아리아의 라틴어 가사 해석을 보면 이렇다.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괴로움이 없는
참 평화 없어라
오직 예수께만
참되고 진실한 평화가 있나니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그 영혼은 만족을 얻나니
그의 유일한 소망
순결한 사랑이여”
괴로움이 없는
참 평화 없어라
오직 예수께만
참되고 진실한 평화가 있나니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그 영혼은 만족을 얻나니
그의 유일한 소망
순결한 사랑이여”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이 음악을 듣는다. 고난을 이기시고 참 평화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다. 그리고 떡을 떼시고 말씀을 나누어 주신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제자들처럼 깜짝 놀라며 참 평화가 내게 이미 있음을 깨닫는다. 내 옆에 이미 계신 예수님을 본다.
이제 영원히 놓치지 않을 평화와 평안을 느낀다. 예수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고, 우리는 참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산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화가 느껴지는 곡이다.
다시 엠마오로 걸어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투영된다. 그때 누군가 내게 “어디에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을 알아봐야 한다.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이다. 절로 눈물이 난다. 내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약속하신 그대로 부활하셔서 내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느낀다.
또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다. 카라바조는 예수님 건너편에 내가 앉을 자리를 남겨 두었다. 떨어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테이블 끝에 놓인 과일바구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그 과일바구니를 두 손으로 받으면서 예수님 앞에 앉아서 부활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 말씀에 함께 빠져 들어보자.
/ 최정주 권사(이수공동체, 아트앤뮤직 큐레이터)
이제 영원히 놓치지 않을 평화와 평안을 느낀다. 예수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비록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고, 우리는 참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산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찬양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화가 느껴지는 곡이다.
다시 엠마오로 걸어가던 제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자들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투영된다. 그때 누군가 내게 “어디에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을 알아봐야 한다.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이다. 절로 눈물이 난다. 내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약속하신 그대로 부활하셔서 내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느낀다.
또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다. 카라바조는 예수님 건너편에 내가 앉을 자리를 남겨 두었다. 떨어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테이블 끝에 놓인 과일바구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그 과일바구니를 두 손으로 받으면서 예수님 앞에 앉아서 부활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 말씀에 함께 빠져 들어보자.
/ 최정주 권사(이수공동체, 아트앤뮤직 큐레이터)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