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사랑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성 목요일의 역할
특별기고
사랑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
그리고 성 목요일의 역할
그리고 성 목요일의 역할
“예수님이라면 케이크를 만들어 주셨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LGBTQ 유형의 사람들을 미워한다.”, “당신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어째서 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진실하도록 그냥 놔두면 안 되는가?”, “그건 단지 너에게 진리일 뿐이지 나에게도 진리인 건 아니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줘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침묵시키거나 당황스럽게 하는 모든 슬로건은 근본적으로 진실과 사랑이 양립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 특히 성생활과 젠더에 관한 문제에서는 불친절하고 편협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 중에는 특이하게 ‘기독교적인’ 버전도 있다. 특히 문화적으로 논란이 많은 사안에서는 도덕적인 견해를 밝힌다는 게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오히려 교회가 더욱 환영하고,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피해야 한다고들 한다. 결국, “복음은 정말 다 포용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특히 고난주간 내내 이러한 사고방식에 직접적으로 부딪칠 것이다.
‘세족 목요일(Mundy Thursday)’은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 교회력에서 정한 날이다. ‘Mundy’라는 단어는 ‘명령(mandate, commandate)’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최초의 성찬 예식을 하셨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고 ‘새로이 명령’하셨다. 본인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손수 대야와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만찬’이자 첫 번째 성찬식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원래 명령, 유월절을 기념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었다.
예수님은 오래된 기념일에 단순히 명령 하나를 추가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셨다. 이제는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들을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기억하기보다 그들이 예수님의 깨어진 몸과 흘린 피를 기억하도록 하셨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명령은 새로운 구원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이 어떻게 마침내 패배했는지를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적어도 20세기 중반부터 서구의 교회들은 ‘교회란 주로 진리를 선포하는 곳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곳인가?’의 문제로 분열되었다. 최근 이러한 논쟁의 빈도가 상당히 증가했다. 예수님의 만찬과 예수님의 새로운 명령은 이것이 잘못된 이분법이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진리와 사랑은 절대로 분리될 필요가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어떻게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는지, 진리를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날 밤 다른 사람을 섬김(사랑)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삶을 보여주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사실 우리는 하나만 선택해서도 안 된다. 이 둘은 모두 같은 근원, 특히 같은 분(예수님)께 기반하기 때문에 항상 함께 간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뿐 아니라 고난주간을 기념하는 모든 일에서 진리와 사랑을 구현하셨다.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실제로 부활하셨다.
/ 존 스톤스트리트(척 콜슨 기독교세계관 센터 대표)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침묵시키거나 당황스럽게 하는 모든 슬로건은 근본적으로 진실과 사랑이 양립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 특히 성생활과 젠더에 관한 문제에서는 불친절하고 편협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 중에는 특이하게 ‘기독교적인’ 버전도 있다. 특히 문화적으로 논란이 많은 사안에서는 도덕적인 견해를 밝힌다는 게 복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오히려 교회가 더욱 환영하고,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피해야 한다고들 한다. 결국, “복음은 정말 다 포용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특히 고난주간 내내 이러한 사고방식에 직접적으로 부딪칠 것이다.
‘세족 목요일(Mundy Thursday)’은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 교회력에서 정한 날이다. ‘Mundy’라는 단어는 ‘명령(mandate, commandate)’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최초의 성찬 예식을 하셨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고 ‘새로이 명령’하셨다. 본인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손수 대야와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후의 만찬’이자 첫 번째 성찬식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원래 명령, 유월절을 기념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명령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새로운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었다.
예수님은 오래된 기념일에 단순히 명령 하나를 추가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셨다. 이제는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들을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기억하기보다 그들이 예수님의 깨어진 몸과 흘린 피를 기억하도록 하셨다. 궁극적으로 새로운 명령은 새로운 구원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단순히 죽음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이 어떻게 마침내 패배했는지를 기억하라는 의미였다.
적어도 20세기 중반부터 서구의 교회들은 ‘교회란 주로 진리를 선포하는 곳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곳인가?’의 문제로 분열되었다. 최근 이러한 논쟁의 빈도가 상당히 증가했다. 예수님의 만찬과 예수님의 새로운 명령은 이것이 잘못된 이분법이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진리와 사랑은 절대로 분리될 필요가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어떻게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는지, 진리를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날 밤 다른 사람을 섬김(사랑)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삶을 보여주라고 명하셨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사실 우리는 하나만 선택해서도 안 된다. 이 둘은 모두 같은 근원, 특히 같은 분(예수님)께 기반하기 때문에 항상 함께 간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뿐 아니라 고난주간을 기념하는 모든 일에서 진리와 사랑을 구현하셨다.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실제로 부활하셨다.
/ 존 스톤스트리트(척 콜슨 기독교세계관 센터 대표)
작성자 김다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