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가치와 존엄한 죽음] 안락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생명의 가치와 존엄한 죽음
1. 안락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의사조력자살 법안 제정되면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
지난 21대 국회에서 안락사를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조력존엄사법’이라는 이름으로 발의된 안락사인 ‘의사조력자살’ 법안이 계류 중이었다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다. 하지만 2024년 5월 30일 시작하는 22대 국회에서 재발의 할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이 죽음 앞에서 병상에 누워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의미 없는 삶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고통받으며 죽는 대신 내 의지로 깨끗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막연히 존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의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의사조력자살, 즉 안락사는 결코 안락한 죽음이 될 수 없다. 내 호흡이 자연스럽게 그치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삶이 힘들다며 처방약을 먹고 자살하는 의사조력자살은 목숨을 잃어버린 본인은 물론이고, 고통을 견디는 대신 죽음을 택한 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안락하지 않은 억지 죽음일 뿐이다.
이미 안락사를 허용한 여러 나라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부작용이 쏟아지고 있다. 병의 고통 앞에서 너무 쉽게 안락사를 택하려는 ‘생명 경시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극도의 신체적 통증이 없더라도 정신질환이나 고독함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어떤 노인은 너무 오래 살았다며 의사조력자살을 택했다. 신체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우울증에 의한 자살 충동으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조력자살을 권유받는 황당한 일마저 생기고 있다. 어느 나라나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법의 제정은 고통 받는 말기 환자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 적극적으로 환자의 통증이나 우울증을 조절하려는 노력 대신 스스로 쉽게 생명을 포기하거나 주위에서 포기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락사 법안이 제정되면 고통을 통과하고, 인생을 장엄하게 마감하는 존엄한 자연적인 죽음의 의미가 점차 오염될 수 있다. 자연사를 맞이하는 임종의 순간을 지키는 것은 활기찬 생명이 주는 것과 또 다른 생명의 깨우침을 준다. 죽음 앞에 마지막 가쁜 숨을 힘겹게 내쉬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숨 쉬는 삶에 대한 겸손을 배우게 된다. 육신의 죽음 이후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얻는다. 존엄한 죽음의 모습이 약물 투여로 인한 자살로 훅 끝나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하는 일이다. 삶의 완성이 되는 죽음의 시간을 너무 성의 없게 대하는 것이다. 의사조력자살이 마치 좋은 죽음을 완성해 줄 것으로 오해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이 몇 차례 기고를 통해서 폐기된 지난 법안의 문제점을 기록하고, 안락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죽음과 바꾸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어떡해야 안락하고 존엄하게 생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논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죽음 앞에서 병상에 누워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의미 없는 삶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고통받으며 죽는 대신 내 의지로 깨끗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막연히 존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의적으로 생명을 종결시키는 의사조력자살, 즉 안락사는 결코 안락한 죽음이 될 수 없다. 내 호흡이 자연스럽게 그치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삶이 힘들다며 처방약을 먹고 자살하는 의사조력자살은 목숨을 잃어버린 본인은 물론이고, 고통을 견디는 대신 죽음을 택한 이를 바라보는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주는 안락하지 않은 억지 죽음일 뿐이다.
이미 안락사를 허용한 여러 나라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부작용이 쏟아지고 있다. 병의 고통 앞에서 너무 쉽게 안락사를 택하려는 ‘생명 경시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극도의 신체적 통증이 없더라도 정신질환이나 고독함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어떤 노인은 너무 오래 살았다며 의사조력자살을 택했다. 신체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거나 우울증에 의한 자살 충동으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조력자살을 권유받는 황당한 일마저 생기고 있다. 어느 나라나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법의 제정은 고통 받는 말기 환자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긍휼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 적극적으로 환자의 통증이나 우울증을 조절하려는 노력 대신 스스로 쉽게 생명을 포기하거나 주위에서 포기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락사 법안이 제정되면 고통을 통과하고, 인생을 장엄하게 마감하는 존엄한 자연적인 죽음의 의미가 점차 오염될 수 있다. 자연사를 맞이하는 임종의 순간을 지키는 것은 활기찬 생명이 주는 것과 또 다른 생명의 깨우침을 준다. 죽음 앞에 마지막 가쁜 숨을 힘겹게 내쉬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숨 쉬는 삶에 대한 겸손을 배우게 된다. 육신의 죽음 이후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얻는다. 존엄한 죽음의 모습이 약물 투여로 인한 자살로 훅 끝나버리는 것은 어찌 보면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하는 일이다. 삶의 완성이 되는 죽음의 시간을 너무 성의 없게 대하는 것이다. 의사조력자살이 마치 좋은 죽음을 완성해 줄 것으로 오해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이 몇 차례 기고를 통해서 폐기된 지난 법안의 문제점을 기록하고, 안락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정리하려 한다. 죽음과 바꾸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어떡해야 안락하고 존엄하게 생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논하고자 한다.
안락사의 정의와 논란
첫째, 안락사의 정의다. 안락사의 구분은 크게 식물인간이나 중증 치매 환자에게 물과 영양분 공급을 끊어 굶어 죽게 내버려 두는 ‘소극적 안락사’와 환자에게 직접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로 나눌 수 있다. 통상 언론에서 사용하는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은 적극적 안락사를 말한다. 보통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물을 환자의 혈관에 직접 투여하면 안락사라 부른다. ‘병든 동물을 안락사 시킨다’는 의미와 같이 사용한다. 치사 약물을 의사로부터 처방받아 환자 본인이 먹거나 투여하면 ‘의사조력자살’이라고 부른다.
둘째, 대한민국에서의 안락사 논란이다. 2022년 6월 안규백 의원이 2018년 제정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한 연명의료결정법에 ‘조력존엄사’를 끼워 넣자며 개정안을 발의했다. 조력존엄사는 의사조력자살을 뜻한다. 안 의원은 국민의 80% 이상이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설문 결과에 따라 법안을 발의한다고 했다. 그 설문지의 질문은 “조력존엄사를 도입하여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증진하는 일에 찬성하는지?”였다. 아무래도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시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조력), 존엄하게 죽을 수 있다면(존엄사) 이보다 좋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안락사가 생명 경시의 위험이 있다고 해도 그 법안은 대상을 1) 말기 환자로서 2)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상황일 때 3) 본인의 희망하는 경우로만 엄격히 제한하겠다니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법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셋째, ‘조력존엄사법’이라는 명칭의 문제다. 안 의원은 의사조력자살법을 발의하면서 ‘조력존엄사’라는 신조어를 사용했다. 이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확한 용어인 ‘의사조력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 PAS)’대신 존엄사를 사용한 것은 ‘자살’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마치 자살이 존엄사인 것처럼 호도하는 위험한 일이다. 법안 발의 이후 사회 각계에서 ‘조력존엄사’라는 용어의 부적절성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그러자 최근에는 이를 의사조력죽음이나 의사조력사망으로 표현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말은 통상 죽음이나 사망이라는 단어 앞에는 죽음을 일으킨 원인을 적는다. 사고사, 질식사, 추락사처럼 말이다. 의사조력사망이라고 표현하면 의사의 조력이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의사가 살인의 주체라는 오해가 생긴다. 그런데 조력존엄사건, 조력사망이건 그 어떤 명칭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숨기면 국민에게 정확한 뜻을 전달할 수 없다. 국민에게 의견을 묻고 판단을 받을 목적이라면 정확하게 ‘의사조력자살법’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설문 역시 “의사조력자살을 도입하여 고통받는 말기 환자가 되었을 때, 당신은 처방 약물을 먹고 자살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둘째, 대한민국에서의 안락사 논란이다. 2022년 6월 안규백 의원이 2018년 제정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한 연명의료결정법에 ‘조력존엄사’를 끼워 넣자며 개정안을 발의했다. 조력존엄사는 의사조력자살을 뜻한다. 안 의원은 국민의 80% 이상이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설문 결과에 따라 법안을 발의한다고 했다. 그 설문지의 질문은 “조력존엄사를 도입하여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증진하는 일에 찬성하는지?”였다. 아무래도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시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조력), 존엄하게 죽을 수 있다면(존엄사) 이보다 좋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안락사가 생명 경시의 위험이 있다고 해도 그 법안은 대상을 1) 말기 환자로서 2)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상황일 때 3) 본인의 희망하는 경우로만 엄격히 제한하겠다니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법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셋째, ‘조력존엄사법’이라는 명칭의 문제다. 안 의원은 의사조력자살법을 발의하면서 ‘조력존엄사’라는 신조어를 사용했다. 이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확한 용어인 ‘의사조력자살(physician assisted suicide, PAS)’대신 존엄사를 사용한 것은 ‘자살’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회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마치 자살이 존엄사인 것처럼 호도하는 위험한 일이다. 법안 발의 이후 사회 각계에서 ‘조력존엄사’라는 용어의 부적절성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그러자 최근에는 이를 의사조력죽음이나 의사조력사망으로 표현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말은 통상 죽음이나 사망이라는 단어 앞에는 죽음을 일으킨 원인을 적는다. 사고사, 질식사, 추락사처럼 말이다. 의사조력사망이라고 표현하면 의사의 조력이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의사가 살인의 주체라는 오해가 생긴다. 그런데 조력존엄사건, 조력사망이건 그 어떤 명칭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숨기면 국민에게 정확한 뜻을 전달할 수 없다. 국민에게 의견을 묻고 판단을 받을 목적이라면 정확하게 ‘의사조력자살법’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설문 역시 “의사조력자살을 도입하여 고통받는 말기 환자가 되었을 때, 당신은 처방 약물을 먹고 자살하시겠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대상자 결정 문제와 고통의 기준 모호
넷째, 법안 대상자 결정의 문제점이다. 개정안에는 의사조력자살을 희망하는 사람은 보건복지부장관 소속의 심사위원회에 신청하고 심사를 받도록 했다. 심사위원회는 ‘말기 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 본인이 희망한다’는 명확한 의견을 전달한 자를 조력자살 대상자로 결정하기로 했다. 얼핏 보면 엄격하게 대상자를 심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러기가 어렵다. 이미 의사조력자살을 시행하고 있는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말기 환자라는 기준도, 수용하기 어렵다는 고통의 기준도, 본인이 희망한다는 것도 모호할 때가 있다. 이 경우 대개 조력자살 대상을 제한하는 대신 대상자 범위를 확대해서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조력자살을 택할 수 있도록 법안이 개정되기 마련이다. 그것을 죽음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모호함은 ‘말기 환자’의 기준이다. 수개월 내에 사망이 예상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언제부터 조력자살을 허용할 수 있는지 시점을 정확하게 예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준이 수개월의 여명만 남은 말기 환자뿐 아니라 수년 후에라도 사망할 수 있는 불치병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6개월 남은 시한부 환자에게는 조력자살이 허용되고, 12개월 남은 환자는 안 된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도 환자가 몇 개월 내에 죽을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고통받는 시간이 말기 환자보다 긴 근위축증이나 치매 같은 다른 불치병 환자들의 안락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번째 모호함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의 기준이다. 여기서 고통은 진통제로도 조절이 안 되는 통증(pain)만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 통증을 넘어서는 정서적 고통(suffering) 또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외면할 수 없다. 어떤 이에게는 고독함이, 어떤 이에게는 일상의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또는 자신의 질병으로 가족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될 수 있다. 자폐나 지적장애가 있는 환자의 경우는 삶이나 세상에 대처할 수 없는 게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이다. 처음에는 지독한 암성 통증과 같이 진통제로 조절이 잘 안되는 말기 환자의 고통이 대상이었는데, 이미 합법화된 나라를 보면 불치병이나 정신질환, 치매,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알코올 중독까지 조력자살 시키는 쪽으로 법안을 확대했다.
그 세 번째 모호함은 본인의 희망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다. 애초 법안은 성인의 온전한 자기결정권에 따른 조력자살 희망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청소년은 어떠한가? 또는 더 어린 11세 이하의 아이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어리다고 본인 희망을 무시할 것인가. 평등 원칙에 위배 되기에 결국 벨기에, 네덜란드는 나이 제한을 철폐하고 모든 연령의 안락사를 허용했다. 본인이 안락사를 원한다는 말을 못 하는 중증 치매 환자는 어찌할 것인가. 치매가 오기 전 사전의료의향서에 치매가 오면 안락사를 원한다고 말해놓았다면, 치매 환자는 지금 당장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안락사를 당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의사조력자살 법안은 일단 제정이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이다(계속).
/ 문지호 집사(한강공동체 ,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부소장)
그 첫 번째 모호함은 ‘말기 환자’의 기준이다. 수개월 내에 사망이 예상되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언제부터 조력자살을 허용할 수 있는지 시점을 정확하게 예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준이 수개월의 여명만 남은 말기 환자뿐 아니라 수년 후에라도 사망할 수 있는 불치병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6개월 남은 시한부 환자에게는 조력자살이 허용되고, 12개월 남은 환자는 안 된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도 환자가 몇 개월 내에 죽을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고통받는 시간이 말기 환자보다 긴 근위축증이나 치매 같은 다른 불치병 환자들의 안락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번째 모호함은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의 기준이다. 여기서 고통은 진통제로도 조절이 안 되는 통증(pain)만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 통증을 넘어서는 정서적 고통(suffering) 또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외면할 수 없다. 어떤 이에게는 고독함이, 어떤 이에게는 일상의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또는 자신의 질병으로 가족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될 수 있다. 자폐나 지적장애가 있는 환자의 경우는 삶이나 세상에 대처할 수 없는 게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이다. 처음에는 지독한 암성 통증과 같이 진통제로 조절이 잘 안되는 말기 환자의 고통이 대상이었는데, 이미 합법화된 나라를 보면 불치병이나 정신질환, 치매,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알코올 중독까지 조력자살 시키는 쪽으로 법안을 확대했다.
그 세 번째 모호함은 본인의 희망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다. 애초 법안은 성인의 온전한 자기결정권에 따른 조력자살 희망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청소년은 어떠한가? 또는 더 어린 11세 이하의 아이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어리다고 본인 희망을 무시할 것인가. 평등 원칙에 위배 되기에 결국 벨기에, 네덜란드는 나이 제한을 철폐하고 모든 연령의 안락사를 허용했다. 본인이 안락사를 원한다는 말을 못 하는 중증 치매 환자는 어찌할 것인가. 치매가 오기 전 사전의료의향서에 치매가 오면 안락사를 원한다고 말해놓았다면, 치매 환자는 지금 당장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안락사를 당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의사조력자살 법안은 일단 제정이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을 낳게 될 것이다(계속).
/ 문지호 집사(한강공동체 , 성산생명윤리연구소 부소장)
작성자 김다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