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흔들리고, 넘어질 수도 있다!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흔들리고, 넘어질 수도 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고백도 했는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당장 오늘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있어도 확신이 없을 수 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누구에게 쓰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 즉 성도들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믿는 것과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항상 비례해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도 그 믿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수 있다. 가령 거부(巨富)의 상속자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로 살다가 어린아이로 죽으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알지 못한다. 구원을 받았지만 결코 구원이 주는 기쁨과 평강을 누려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를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실 큰 민족에 대한 비전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보인 행동은 그 땅을 이탈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떠난 이의 선택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결정이었다.
하나님은 또다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셨다(창 15장).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시기 위해서 과거에 약속하신 언약을 상기시켜주셨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고 본처 사라가 아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창 17장) 동일한 언약을 상기시키며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되물었다.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과연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사라가 90살인데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대놓고 하나님의 언약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바로 1년 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에 대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창 21장). 본처 사라를 통해 이삭이 출생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뀐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을 전혀 갖지 못하고, 심지어 거절하는 삶을 살았던 그가 100세에 기적처럼 얻은 아들 이삭마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어드릴 만큼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신앙도 구원의 여정에서 흔들리고 넘어질 수도 있다. 심지어 구원의 사건마저 의심하고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의 불순종과 거절마저 뛰어넘는 신실함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붙들고 계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모습은 의심과 거절과 절망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불안과 염려가 아니라 평강과 기쁨이기 때문이다.
/ 최대흥 목사(J4U청년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누구에게 쓰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 즉 성도들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믿는 것과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항상 비례해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도 그 믿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수 있다. 가령 거부(巨富)의 상속자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로 살다가 어린아이로 죽으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알지 못한다. 구원을 받았지만 결코 구원이 주는 기쁨과 평강을 누려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를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실 큰 민족에 대한 비전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보인 행동은 그 땅을 이탈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떠난 이의 선택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결정이었다.
하나님은 또다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셨다(창 15장). 흔들리는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시기 위해서 과거에 약속하신 언약을 상기시켜주셨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고 본처 사라가 아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하나님은 다시 한번(창 17장) 동일한 언약을 상기시키며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되물었다.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과연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사라가 90살인데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대놓고 하나님의 언약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바로 1년 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에 대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창 21장). 본처 사라를 통해 이삭이 출생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뀐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을 전혀 갖지 못하고, 심지어 거절하는 삶을 살았던 그가 100세에 기적처럼 얻은 아들 이삭마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어드릴 만큼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신앙도 구원의 여정에서 흔들리고 넘어질 수도 있다. 심지어 구원의 사건마저 의심하고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의 불순종과 거절마저 뛰어넘는 신실함을 보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붙들고 계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모습은 의심과 거절과 절망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불안과 염려가 아니라 평강과 기쁨이기 때문이다.
/ 최대흥 목사(J4U청년부)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