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_이수연 집사
“죽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줄 아세요?”
병마도, 시련도 꺾지 못한 이수연 집사의 중보기도 열정
햇수로 19년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이수연 집사(한강공동체)는 한결같이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빙고 온누리교회 지하 2층에 있는 아론기도실과 훌기도실은 그녀에게 특별한 장소다. 지난 12일, 어김없이 기도의 자리에서 부르짖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내게 “중보기도가 자신을 살렸다”고 고백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어느 날 병마(病魔)가 찾아왔다. 병명도 희귀하고, 별다른 치료법도 없는 진성다혈증(혈액암 일종)이었다. 적혈구 수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하는 질환이었다.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 병마와 싸웠다. 참 많이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이수연 집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월 중순이다. TIM기도회 취재를 할 때였다. TIM기도회는 TIM파송 선교사들을 위해 매주 월요일마다 중보기도하는 모임이다. 그곳에서 취재하는 도중 이지숙 팀장이 이수연 집사를 소개해줬다.
“이수연 집사님이야말로 기도와 기적의 증인이에요. 그 힘들고 어려운 투병생활을 기도의 힘으로 극복하셨거든요.”
지난 12일에도 이수연 집사는 병원에 가기 전 아론기도실에서 중보기도를 하겠다며 교회에 들렀다. 그녀의 중보기도 열정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동생의 죽음과 머릿니가 준 충격
그녀가 처음 교회에 나온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 집사는 동생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큰 슬픔과 충격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힘들어하는 그녀를 이모가 교회로 초대했다.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고, 마음의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부산에 살고 있던 이수연 집사는 이모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치료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 이후 이 집사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독실하고 뜨거운 신앙생활은 아니었지만 미션스쿨에서 예배드리면서 성인이 되었다. 그러다 천주교 집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자녀들을 정말 귀하게 키웠다. 어린 동생의 죽음을 겪었던 탓에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금지옥엽, 애지중지했다.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공문이 날아왔다. 학생들 사이에 머릿니가 유행하고 있으니 가정에서 관리를 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공문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이 죽은 나이와 당시 딸의 나이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벌벌 떨며 애들을 키웠는데, 그 조그만 머릿니로부터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온누리교회에 오게 되었다. 새벽기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과 아이를 우상처럼 여기고 있는 것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불붙기 시작한 신앙생활은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순장님의 도움으로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새벽기도만으로는 부족했다. 순모임과 각종 기도모임, 예배에 참석했다. 새벽기도 하러 교회 갔다가 집에 와서 남편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로 보내고, 다시 교회 나와 기도했다. 금요철야기도도 했다. 매일같이 그러고 다녔다.
“커다란 간식가방이나 노트북가방을 들고 매일같이 바쁘게 다니는 것을 보더니 경비아저씨가 사업가냐고 묻더라고요. 그만큼 기도하러 교회 가는 게 신나고 재미있었어요.”
1997년, 아론기도실이 처음 생겼을 때에는 순장님과 더불어 젊은 엄마들을 모아 기도모임을 만들었다. 기도실에 옹기종기 모인 젊은 엄마들은 개인기도가 아니라 중보기도를 하려고 모였다. 선교사님들을 위해, 온누리교회와 2000선교본부를 위해, 나라와 열방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단순한 기도모임이 아니라 기도공동체에요. 중보기도하면서 다들 가족처럼 가까워졌어요.”
병마와 시집살이 견디게 해 준 ‘중보기도’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던 이수연 집사에게 불행이 닥쳤다. 마흔이 되자마자 혈액암이 발병했다. 몸이 금방 피곤하고, 쉽게 지쳤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 그런가 보다하고 별 생각 없이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암이었다. 적혈구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진성다혈증이었다. 늘어난 적혈구로 인해 피가 진득해져서 혈관과 심장, 뇌관이 막히는 희귀병이었다. 별다른 수술이나 치료법이 없었다. 항암제를 투여 받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그때부터 길고 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항암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녀의 몸과 마음은 지쳐만 갔다.
“항암치료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6년 정도 항암제를 먹다가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항암치료를 중단했어요.”
그 와중에도 그녀는 중보기도의 자리를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했다. 아픈 몸과 고된 시집살이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는 유일한 창구가 중보기도였기 때문이다.
“처음 병을 알았을 때 시댁이랑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시집살이 스트레스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열심히 기도하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께 섭섭했어요.”
천주교 신자인 시어머니는 그녀가 감당하기에 힘들고 불편한 분이었다. 재력도 부족함이 없고, 아들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키워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셨다.
“한번은 아침 9시 30분이었는데, 어머님이 성당사람들을 저희 집으로 데리고 와서 성경공부를 하시더라고요. 시어머니 손님이니 며느리가 대접하라는 것이죠. 당시 시아버지가 뇌졸중으로 편찮으셨는데 병원 모시고 다니는 것도 제가 했어요. 남편은 손 하나 까딱 안했죠. 집안분위기가 그랬어요. 무조건 며느리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게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도 틈만 나면 성당에 가라고 하는 시어머니의 성화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머니, 저는 교회 안다녔으면 벌써 죽었어요. 제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요.”
약을 끊고 잘 지내나 싶었는데 결국 지난해 사달이 났다. 목욕탕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를 쏟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두 달 만에 퇴원했다. 그러다 올해 4월 또 쓰러졌다. 이번에는 심각했다. 약 40일 가까이 중환자실에 입원해있었다. 한번은 치료받다 심장이 멎는 순간도 있었다. 위험한 순간, 그녀를 지켜준 것은 기도공동체의 중보기도였다.
“정말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셨어요. 중보자들이 울며불며 간절히 기도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때 심장이 완전히 멈췄을 거에요.”
상태가 심각했던지라 19년 가까이 지켜온 기도의 자리에 갈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르고 6개월만인 지난 9월 기도모임에 나왔고 그날 기자와 만난 것이다.
이수연 집사는 자신이 중보기도의 자리를 지킨 것이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의 고백을 듣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2년 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서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장에 엄마 기도팀이 제일 많이 왔고, 제일 많이 위로해 줬어요. 할머니나 고모, 아빠 형제들이랑은 달랐어요. 엄마는 정말 복 받은 것 같아요.”
“엄마는 몸도 아픈데 왜 맨날 교회가요?”라고 말하던 꼬마가 어느덧 청년이 되어 “엄마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한 것이 그녀에게 가장 큰 위로였고, 보상이었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토록 축복된 기도의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저는 그저 기도의 자리를 지킨 것뿐이에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하늘나라 갈 때까지 기도밖에 할 게 없어요. 죽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 인줄 아세요?”
이수연 집사는 오늘도, 내일도, 또 다음날도 기도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작성자 김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