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 해설]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마 21:19)
맛있는 말씀 해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마 21: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 21:19).
영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무화과의 철이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예수의 인격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도 이 구절을 참 이해하기 난감할 것이다.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11장 13절에 따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 11:13)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화과는 당연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자적으로 본문을 읽으면 예수님이 몹시 배가 고픈데 먹을 열매를 얻지 못해 신경질을 부리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매우 암시적인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자들이 자주 행했던 상징 행동이다. 볼 눈이 없고,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상징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1장 전체를 읽어보면 납득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가셨는데 기도는 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장사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이 그 장면을 보시고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시각장애인과 다리가 불편한 자를 고쳐주셨는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기뻐하기보다 이상하게 여긴다. 이 상황을 겪고 난 다음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찾으셨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저주한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성전의 참된 기능을 못하는 유대 종교와 성전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가 종종 유대교를 상징해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저주는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전과 유대교는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종교는 언제든지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제 철을 기다리며 잠을 자는 종교는 더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종교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에 얽매이는 종교가 아니다. 어디에서든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과 열린 교제를 할 수 있는 종교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불편해했기 때문에 상징적 행동을 통해서 볼 눈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무화과나무가 마른 기적 현상에만 궁금증을 가진다.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제자들의 눈높이에서 함축적으로 말씀하신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종교는 영원히 그 기능을 상실했다. 참된 종교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시작된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신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영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무화과의 철이 아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예수의 인격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도 이 구절을 참 이해하기 난감할 것이다.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 11장 13절에 따르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 11:13)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화과는 당연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자적으로 본문을 읽으면 예수님이 몹시 배가 고픈데 먹을 열매를 얻지 못해 신경질을 부리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행동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매우 암시적인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예언자들이 자주 행했던 상징 행동이다. 볼 눈이 없고,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상징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1장 전체를 읽어보면 납득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전에 가셨는데 기도는 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장사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이 그 장면을 보시고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시각장애인과 다리가 불편한 자를 고쳐주셨는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기뻐하기보다 이상하게 여긴다. 이 상황을 겪고 난 다음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찾으셨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저주한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성전의 참된 기능을 못하는 유대 종교와 성전을 상징한다. 무화과나무가 종종 유대교를 상징해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저주는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전과 유대교는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종교는 언제든지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제 철을 기다리며 잠을 자는 종교는 더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필요한 종교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장소에 얽매이는 종교가 아니다. 어디에서든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과 열린 교제를 할 수 있는 종교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불편해했기 때문에 상징적 행동을 통해서 볼 눈이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무화과나무가 마른 기적 현상에만 궁금증을 가진다.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제자들의 눈높이에서 함축적으로 말씀하신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종교는 영원히 그 기능을 상실했다. 참된 종교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에 의해서 새롭게 시작된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신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작성자 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