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말씀해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창 2:17)
맛있는 말씀해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창 2:17)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있었다. 생명 나무의 열매를 포함해서 모든 나무의 열매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이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것은 먹는 일이 생명과 직결될 뿐 아니라 욕망과도 깊이 관련 있기 때문이다.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욕망이 있어야 필요를 채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탐욕이 되고, 죄를 낳게 된다. 배고픔에서 나오는 욕망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은 생존을 위한 것 그 이상이다. 우리도 매일 경험하지만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이 결코 작지 않다. 맛있는 음식이 되려면 맛뿐 아니라 모양, 색깔 등 시각적인 요소가 매우 훌륭해야 한다. 인류의 첫 여자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 그녀는 먹고 싶은 욕망에 취해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자신의 시각적인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높게 두었다.
먹는 것을 통해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게 아니라 직접 몸으로 강렬하게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이 외부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소화되어 내 몸의 일부가 되듯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불순종의 ‘악’을 몸 안으로 들여서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이처럼 불순종을 통해 ‘악’을 경험함으로써 ‘선’의 삶을 잃어버렸다. 아담과 하와가 일상의 삶에서 당연히 누리던 ‘선’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다. 아담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잃어버렸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악’을 경험함으로 ‘선’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인 인류 전체는 그의 범죄함으로 태어날 때부터 ‘악’을 몸에 지닌 채 ‘선’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람의 타락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몸에 이미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선’에 참여하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구원의 은혜는 믿음으로 받지만, 믿는 자는 예수님의 몸과 피인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식을 통해서 그분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성육신한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어린양이시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불순종의 죄 아래 있을 때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순종해서 사람의 몸이 되셨다. 아담이 하나님의 선함과 함께 있을 때 악함을 선택한 것과 반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악함에 있을 때 순종의 선함을 선택하셨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떡을 먹는다는 것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순종, 즉 ‘선’이 내 안에 들어오는 놀라운 신비다. 그러나 악함을 경험하면 선을 잃어버리지만, 선함을 경험한다고 해서 저절로 악함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흰 도화지에는 조금만 먹물이 묻어도 얼룩이 되지만, 얼룩진 도화지에 흰색이 조금 묻는다고 흰 도화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은 ‘선’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악’이 없어지고 ‘선’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얼룩진 도화지가 성령님으로 인해 불타 없어지고, 깨끗한 흰 도화지로 바뀌는 것이다.
성찬식은 단순히 예배 시간이 길어진 주일에 반복되는 의식에 불과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인 나를 지워버리고, 순종의 그리스도인 선으로 대체되는 시간이다. 일상의 평범한 떡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이유는 성찬식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불순종의 내가 죽고, 순종의 그리스도만이 내 안에 사심을 체험하는 은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당부 아닐까?
/ 이은일 장로(성북공동체, 고려대의과대학 교수)
먹는 것을 통해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게 아니라 직접 몸으로 강렬하게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이 외부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소화되어 내 몸의 일부가 되듯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은 불순종의 ‘악’을 몸 안으로 들여서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이처럼 불순종을 통해 ‘악’을 경험함으로써 ‘선’의 삶을 잃어버렸다. 아담과 하와가 일상의 삶에서 당연히 누리던 ‘선’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다. 아담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잃어버렸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악’을 경험함으로 ‘선’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인 인류 전체는 그의 범죄함으로 태어날 때부터 ‘악’을 몸에 지닌 채 ‘선’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람의 타락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몸에 이미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선’에 참여하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구원의 은혜는 믿음으로 받지만, 믿는 자는 예수님의 몸과 피인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식을 통해서 그분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성육신한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어린양이시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이 불순종의 죄 아래 있을 때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순종해서 사람의 몸이 되셨다. 아담이 하나님의 선함과 함께 있을 때 악함을 선택한 것과 반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악함에 있을 때 순종의 선함을 선택하셨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떡을 먹는다는 것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순종, 즉 ‘선’이 내 안에 들어오는 놀라운 신비다. 그러나 악함을 경험하면 선을 잃어버리지만, 선함을 경험한다고 해서 저절로 악함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흰 도화지에는 조금만 먹물이 묻어도 얼룩이 되지만, 얼룩진 도화지에 흰색이 조금 묻는다고 흰 도화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은 ‘선’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악’이 없어지고 ‘선’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얼룩진 도화지가 성령님으로 인해 불타 없어지고, 깨끗한 흰 도화지로 바뀌는 것이다.
성찬식은 단순히 예배 시간이 길어진 주일에 반복되는 의식에 불과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써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인 나를 지워버리고, 순종의 그리스도인 선으로 대체되는 시간이다. 일상의 평범한 떡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이유는 성찬식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불순종의 내가 죽고, 순종의 그리스도만이 내 안에 사심을 체험하는 은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당부 아닐까?
/ 이은일 장로(성북공동체, 고려대의과대학 교수)
작성자 김다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