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주일강단

결혼 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장 1절~14절

이재훈 목사

 

예복을 받는 것은 믿음이요, 갈아입는 것은 회개입니다.회개는 즐거운 일을 위해 괴로운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은혜의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날마다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잔치를 누리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흔히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시작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으로 찾아왔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이 땅에서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죽고 난 이후에 경험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결혼잔치 같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마치 왕자의 결혼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는 사랑으로 만들어집니다. 잔치는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베풀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러한 마음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잔치에는 언제나 웃음과 재미가 있습니다. 또 감동과 축복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도 잔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잔치의 기쁨을 절기를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절기의 대부분은 잔치였습니다. 잔치를 하기 위한 비용은 십일조로 충당했습니다. 구약에 세 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나옵니다. 오늘날 헌금과 종류가 달라졌지만 원리는 동일합니다. 첫째, 국가에 내는 세금으로 십일조가 있었고, 둘째, 종교적 절기를 지키기 위한 십일조가 있었고, 셋째는 구제와 나눔의 용도로 사용되는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절기를 잔치형태로 만든 이유

 

“해마다 밭에서 나는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떼는 것을 명심하라. 너희 곡식과 기름과 새 포도주의 십일조와 너희 소와 양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그분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곳으로 선택하시는 그 장소에서 먹도록 하라. 그러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호와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곳이 너무 멀어서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복을 받았지만 십일조를 가지고 갈 수 없다면 너희 십일조를 은으로 바꾸어 가지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곳으로 가라. 그 은을 가지고 너희가 원하는 것을 사되 소, 양, 포도주, 다른 종류의 술 등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사라. 거기서 너희와 너희 가족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즐거워하라(신 14:24~26).  이 말씀의 초점은 먹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절기들을 잔치형태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누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절기를 잔치로 만드셨습니다.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

 

오순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그분이 당신의 이름을 둘 곳으로 선택하신 그곳에서 기뻐하되 너와 네 아들딸들과 네 남종들과 여종들과 네 성안의 레위 사람들과 너희 가운데 사는 이방 사람들과 고아들과 과부들이 함께 즐거워하라”(신 16:14).장막절(초막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장막절을 기뻐하되 너와 네 아들딸들과 네 남종들과 네 여종들과 네 성안에 사는 레위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과 고아들과 과부들과 함께 기뻐하라”(신 16:14).  절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또 무엇 때문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부유한자나 가난한자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고아나 과부에게도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절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절기를 기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잔치를 여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고통스럽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잔치의 기쁨이 이스라엘의 절기 가운데 스며들어 있습니다. 절기는 축제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환경,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입니다.

 

왕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절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기쁨입니다. 거룩한 삶은 우울한 삶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초월한 기쁨을 누리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삶입니다. 거룩함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놀라움과 새로움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하고 슬픈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 있는 능력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춤추는 하나님만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아들이 돌아오자 춤을 추며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춤추는 하나님입니다. 스바냐 3장에도 하나님이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기쁨을 나눠 주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는 왕의 아들의 결혼잔치입니다. 오늘날에도 영국 왕실의 결혼식은 세계적인 이슈가 됩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영국국민인데 왕실의 결혼식에 초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결혼식에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결혼식에 참여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놓고 일평생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초대받은 결혼식에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왕을 대적하는 악한 행동

 

“왕은 자기 종들을 보내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겠다고 했다”(3절).그들은 왕에게 정중한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이 백성들 가운데 구별된 사람을 초대한 것입니다. 결혼잔치에 와서 일을 하는 종을 초대한 것이 아닙니다. 뇌물을 가져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내빈처럼 정중하게 초대했는데 그들은 왕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왕은 호의를 베풀어 초대를 했는데도 거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잔치를 벌이려면 일단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합니다. 그리고 풍성한 음식과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 마음으로 참석한 사람들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 참석한 사람들이 모인 것은 잔치가 아닙니다. 왕은 기쁨이 넘치는 잔치를 하고 싶어서 그들을 다시 한 번 초대했습니다. “왕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말했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내가 만찬을 준비했다고 전하라.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았고 모든 것이 준비됐으니 어서 결혼 잔치에 오시라고 하라’”(4절).  왕이 재차 정중하게 초청을 했습니다. 잔치를 위한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준비해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황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아 놓고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왕의 관대한 초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왕의 심부름을 온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가장 먼저 응해야할 초대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각기 가 버렸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5~6절).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왕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밭을 사서 밭에 가봐야 합니다”, “황소 다섯 마리를 돌봐야합니다”, “아내를 혼자 둘 수 없어서 못갑니다” 등 결혼잔치에 가지 못하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타당한 이유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이유들은 모두 변명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이 누군가를 초대할 때에는 반드시 사전에 두 번에 걸쳐 초대를 했다고 합니다. 먼저는 날짜를 알려주고,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초대를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초대에 응하는 계획을 미리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타당해 보이는 이유를 들어 왕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의 사정은 변명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삶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충실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충실하게 사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응해야하는 초청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어야 합니다. 공의를 져버리는 것은 분명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버리는 것은 분명한 죄라고 생각하지만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 한 나라의 왕이 허리를 굽혀서 초청을 했습니다. 사실 왕은 잔치에 참석하라고 명령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정중하게 초청을 했습니다. 왕이 허리를 굽힌 은혜에 마땅히 응답한다면 결혼잔치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의를 져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은혜를 저버리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 초대에 온전히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주변에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초정에 응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늘잔치에 참여하는 축복

 

두 번째 거절한 부류의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우 불합리한 태도로 왕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자신들에게 왕자의 결혼식에 초청하는 영광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광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왕에게  대항한 악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역사 속에 너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들을 잡아 죽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은혜로운 왕의 초대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왕을 배역하고 반역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그들을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심판을 행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은혜로 우리를 초대하신 하나님의  부름에 거역할 뿐만 아니라 그의 종들을 핍박한 자들은 하나님이 너그럽게 대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오늘 비유는 대적자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비유가 시작됩니다.  왕은 잔치를 포기 하지 않습니다. 왕이 계획을 바꿔 길거리에 나가서 누구나 이 잔치에 오도록 하고 명령합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종들이 길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아마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잔치에 한번 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왕궁에 처음 들어가 본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비유의 요점이 무엇일까요.  왕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거절했지만 자격 없는 사람들은 왕이 연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이 왕의 은혜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성찬은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식사하는 하나님의 식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주의 식탁에 나를 초청하심을 감사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앞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받은 상은 말 그대로 밥상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 있는 내게 잔치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원수가 나를 해치려고 노려보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잔치에 참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이 땅에는 원수가 가득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원수들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와 함께 식사하자. 나의 식탁에 참여하라” 날마다 하나님과 식사를 나누는 식탁이 큐티입니다. 큐티를 통해 하나님의 잔치에 참석해 하늘의 양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 두려워하지 않고 원수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없이 날마다 승리하는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하늘의 잔치에 참여하는 축복입니다.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사람은 거절하고 미련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도 이 잔치의 축복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다툼에 개입하면서  하나님과 나누는 잔치의 기쁨을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하늘의 잔치를 날마다 누리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만나는 결혼잔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흠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흠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과 함께 잔치에 자주 참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는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잔치에 자주 참석하는 모습이 흠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도 금식을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게 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예수님이 답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한 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마 2:19~20).  예수님이 하신 결혼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먹고 마셔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로움과 즐거움,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상징으로 결혼잔치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결혼잔치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결혼잔치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만약 이 기쁨이 없다면 금식해야 합니다. 금식을 왜 하는 것입니까. 정말 기뻐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이 금식입니다. 정말 기쁘면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금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 때문에 이 세상의 양식을 먹지 않아도 기쁜 것이 자발적 금식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행하는 금식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금식입니다.

 

예복은 믿음, 갈아입는 것은 회개

 

당시에는 왕이 초청한 잔치에 올 때에는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갑자기 찾아 온 사람을 위한 예복도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복 입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왕이 준비한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예복을 입는 것은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일인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예복을 받는 것은 믿음이요, 옷을 갈아입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즐거운 일을 포기하고 괴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위하여 괴로운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개의 예복을 입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예복이 주어졌습니다. 그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은혜의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날마다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잔치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