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부흥집회

십자가와 자기지혜

3월 28일(목)

십자가와 자기지혜

고전 1:18-25

이재훈 목사

 

 

십자가는 2세기 이후가 돼서야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당시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친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참혹하게 비참하게 수치스럽게 사용 당했던 그 십자가. 바로 그 십자가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초대교회 성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분이 그리스도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전파했던 것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이며 역설적인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의 역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는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가 얼마나 멸시받고 비참하게 여겨지는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시다’라고 하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했던 복음이었습니다. 그 말에는 두 가지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역설은 이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너무나 어리석어보이는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왜 유대인들에게 걸리는 일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킬 때만해도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잡혀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했을 때, 유대인들은 떠났습니다. 메시아는 그럴 수 없다, 표적을 일으켜야한다는 유대인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라는 단어는 있을 수 없으며 연결될 수 없는 표현인 것입니다.

 

헬라인들도 십자가 사건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세상과 철학의 중심이 되는 단어가 로고스(Logos) 입니다. 그리스 헬라의 모든 세계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로고스라는 단어입니다. 로고스란 만물을 움직이는 절대 이성입니다. 모든 만물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이성, 신적인 이성입니다. 그 정도로 헬라사람들에게 로고스는 신적인 영역에 속한 단어였습니다. 로고스가 십자가에 매달렸다니, 받아드릴 수도 없고 어리석은 말입니다. 헬라인들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 메시아이자 로고스가 십자가에 매달려야하는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게나 십자가는 걸림돌이요,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난 ‘십자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왜 미련해보이고 어리석어보이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십자가 방법을 통해 인간을 구원했을까요. 첫째, 세상의 지혜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만일 이런 십자가 없이 인간에게 용서를 선포하면 하나님의 사랑에는 부합하지만 공의에는 맞지 않습니다. 형벌을 가하시고 인간에게 그것으로 그친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만족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본성가운데 일어나는 갈등,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어떻게 충돌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이 만족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성품과도 맞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호세아서 11장 8~9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안타깝게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너희를 포기하겠느냐 버리겠느냐 내버려두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라는 말은 하나님이 공의 때문에 하셔야하는 일과 사랑 때문에 하실 수 없는 일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잘 전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서로 만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지혜로운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 완전한 그 사람에게 모든 진노를 다 쏟아 붓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쏟아 부어지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만난 사건입니다. 거룩하신 사랑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사랑이 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 죄를 멸하시고 동시에 살리시는 그분의 놀라운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 십자가 사건

 

 

예수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세상의 지혜로는 양립될 수 없는 두 단어입니다. 이 세상이 생각하는 은혜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는 은혜를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둘 다 충만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수준을 지키시기 위해서 또 그 진리대로 행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는 제물이 되심으로 그 진리의 기준을 맞추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리를 충족시킨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죄인이라며 죽어야만 하는 그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 그 진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났다면 우리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아름답게 하나 되어 나타나야 할 줄 믿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의와 긍휼이 함께 입맞춤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난 사건이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때문에 십자가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어야만 용서가 됩니다. 진리로 공의가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가운데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어리석어보이지만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지혜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이루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시고 만물의 통치자로 세웠지만 사탄의 꾀에 넘어가 그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그냥 용서한다면 우리는 패배자가 됩니다. 사탄의 종으로 여전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로 사탄을 무너뜨리고 이기는 승리자로 인간을 회복시키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임 당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탄을 향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아난 새 생명으로 물러가라 말할 수 있고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선택으로 사탄의 종이 되었지만 또다시 우리의 선택을 통해서 사탄을 이기는 승리자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 지혜인 것입니다. 사탄의 종이 되었던 사탄에게 내주었던 옛 사람이 십자가에 완전히 장사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새 생명은 사탄을 향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다시 죽고 살아난 사람이 타락 이전의 아담 하와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어쩔 수 없어서 세우신 사후대책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이 바로 십자가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의 지혜로 살아가십시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생명 가운데 십자가의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자신을 못 박은 자는 세상의 지혜 까지도 못 박은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삶의 지혜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옛 생명에 속한 지혜는 세상속의 삶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아무리 화려하고 멋있어 보여도 이 세상에만 집착합니다. 옛 생명에만 집착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지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승리하게 하는 ‘영원한 생명의 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의지하는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이 세상에 집착하는 세상의 지혜입니까 아니면 영생을 바라보는 십자가의 지혜입니까.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지혜’로 판단하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존재로 만나야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바로 십자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로 만날 때 진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온누리교회가 십자가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 인생을 설계할 때도 십자가의 지혜에 합당한 것인지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로 자신을 희생할 때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이 세상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진정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바로 ‘영원한 관점’에서 판단해야합니다. 영원을 보장하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영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을 보장하는 십자가를 찬양하길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영원을 여는 열쇠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의 못 박힌 자로 나의 문제와 갈등을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고 어리석다 말하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진정으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우리의 지혜로 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 정리 조유진 기자 ujin@onnuri.org

작성자  온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