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강의 1 - 예배는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산 하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에베레스트산도 좋고, 후지산도 좋고, 설악산도 좋으니 크고 아름다운 산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저는 어릴 때 미국 시애틀에서 살았는데 그 지역에는 4000미터 높이의 크고 아름다운 레이너산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그 산을 생각하면 한 가지 단순한 모양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런데 레이너산을 보며 자란 사람들이라면 그 산에 대해 제각각의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레이너산은 굉장히 큰 산이었기에 그 다양성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큰 산의 모든 것을 담기엔 사고가 작고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개념은 크지만 현장에선 작은 예배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산은 예배를 뜻합니다. 예배는 엄청나게 큰 과제여서 이번 축제로 다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30년 넘게 예수님께 헌신했고, 20년 이상 성경을 가르쳤지만 제가 나눌 수 있는 관념들조차 예배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축제를 진행하면서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접할 것입니다. 그걸 다 합해도 예배에 대한 전체 관념이 될 수 없습니다.믿는 자로서 우리는 평생 예배를 경험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각각 틀린 교양과 전통을 가진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방방곡곡 다니면서 예배가 얼마나 크고 광대한 것인지 알게 됐습니다. 예배는 큰 주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예배는 작은 것들이었습니다.한 예로 지난 1985년 저는 워싱턴에서 한 지역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 한국 이민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큰 교회였습니다. 저는 부임 전에 그 교회 금요철야예배에 간 적이 있습니다. 20분 정도 찬양이 있었습니다. 스크린엔 가사가 뜨고, 기타, 피아노, 드럼 등 다양한 악기들이 동원된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끝나고 기타가 내려지고 스크린이 꺼진 뒤 목사님이 올라와서 하신 말씀이 놀라웠습니다.“자,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저는 혼동에 사로잡혔습니다.“그렇다면 20여분 동안 찬양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20여 분간 이뤄진 찬양은 그 교회에서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는 예배에 대해 심각한 오해에 빠져 있었고, 그 때의 찬양은 예배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서울에서 일 년 간 사역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저는 신학교 교수가 됐습니다. 15년이 지난 뒤 저는 앞에서 말한 그 한인교회의 초청을 받아 다시 방문하게 댔습니다. 역시 금요철야예배였습니다. 예전과 똑같은 빌딩 안에서 똑같은 악기들이 동원됐습니다. 변한 것은 사람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7~8명의 찬양사역자들이 드럼, 기타 등을 이용해 20여 분간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음악이 꺼졌습니다. 스크린의 불빛도 사라졌습니다. 젊은 목사님 한 분이 나와 영어로 말했습니다.“정말 좋은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설교 순서로 넘어가겠습니다.”저는 또 다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은 이제 예배가 끝났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예배가 끝났으니 이제 설교를 하고, 설교가 끝나면 기도를 하자는 식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찬양이 시작될 때는 “예배로 들어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그 발상은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한인교회 금요예배에 대한 두 번의 경험 사이에는 15년이 흘렀고 그동안 예배에 대한 관념도 백번은 더 바뀌었을 거라 생각합니다.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1985년 금요예배에서 목사님이 말한 예배를 A라고 하고, 2000년에 방문 때 젊은 목사님이 말한 예배를 B라고 합시다. 예배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네, 맞습니다. 적어도 A, B는 아닙니다. 예배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작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많은 교회에서 찬양과 기도만을 예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목사님, 그러면 예배에 지장이 없다면 설교순서는 생략해도 되겠습니다.”이렇게 물어오는 성도도 있었습니다.15년이 지난 뒤 저희 교회는 예배문화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예배도 말씀을 따라 새롭게 정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협소함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찬양이 예배입니까? 맞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잘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는 훈련되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 듣는 것이 예배입니까?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예배의 한 부분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더욱 큽니다.
두 종류의 예배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하실 겁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하는지 여인이 물었습니다.“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한 예배에의 관념도 협소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협소하다는 말과 같습니다.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막힘이 없고 공간의 제한도 없이 모든 곳에 계십니다. 솔로몬은 헌당하면서 하나님은 제약되지 않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작은 공간에 어떻게 크신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예배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청합니다.“그러나 여기서 만나주옵소서.”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채우시는 영원한 분으로서 한 곳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예배드리지 못할 장소란 없으며, 예배하지 말아야 할 시간도 없습니다. 예배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24시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풀타임(Full Time)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저희들이 예배를 생각할 때 두 종류의 예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사람들이 모였을 때 의도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그 중 하나입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나 주중예배, 새벽기도가 그런 것입니다. 좋은 예배는 액션(Action)입니다. 행위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기도, 말씀 듣기, 헌금 등은 의도적인 예배의 행위이며 이것들도 진정한 예배의 일부입니다.예배에 대해 또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배란 삶’이란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삶 전체를 예배로 봤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서신을 보내면서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따로 시간을 들여 기도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적용하면 무시로 예배해야 하지만 하루를 살면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예배를 드릴 필요도 있다는 말입니다.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예배가 답일까요,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가 답일까요.둘 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내용을 중하게 여기시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이사야 1장 10절에서 18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한다,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며 내가 지기에 곤비하다고 말씀하십니다.하나님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예배를 거부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예배라면 받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명한 것은 하나님이신데 여기서 하나님은 거부하는 예배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손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원하십니다.
삶의 예배 원하시는 하나님
아모스 5장 21~24절을 보십시오.“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2절)“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절)여기서 주님은 좀 더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모임을 내가 싫어한다. 너희의 예배를 멈추라고 말이죠.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노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주일날 모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연장일 때 비로소 아름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종일토록, 일주일 내내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로마서 12장을 보십시오.“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1절)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우리 삶을 통해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주일 날 의도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삶의 반영이 되어야 합니다. 헌금을 할 때도, 찬양을 드릴 때도 내 삶을 드려 찬양한다는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아멘 아멘 할 때 그것이 말씀을 일주일간 순종하겠다는 뜻이어야 합니다.미가서 6장 6~8절입니다.“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참 많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신약에서 바리새인에게 한 말을 알고 있습니까.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의 몸과 마음을 다해 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기본입니다. 사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소중한 예배를 말합니다.구약에서 하나님은 희생제물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십니다.잠언 3장입니다.“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마태복음 9장을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세관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면서 제사보다 중요한 ‘삶의 예배’를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잦은 이 같은 행위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살고 계시다면 이 시대 종교지도자들을 화나게 할지도 모릅니다.호세아 6장 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공의요, 긍휼입니다.시편 51편 16절, 17절입니다.“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아
사무엘상 15절엔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사울은 ‘거의’ 진멸했지 약한 것들은 살려두었습니다. 좋은 것을 남겨 두었습니다. 왕도 살려줬습니다. 왕은 승리의 표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사무엘에게 변명합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그것을 살려두었다고 말입니다. 불순종을 변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십니다.여러분은 불순종을 예배를 이용해 정당화하고 있지 않습니까.순종은 곧 예배입니다. 삶을 거룩한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주일날 드리는 예배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주일날 드리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 예배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월요일이 중요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일주일 내내 예배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한국 사정은 어떨지 모르지만 미국의 경우 20세에서 60세까지 성도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평균 시간은 40년 동안 4000시간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헌신된 경우의 수치입니다. 반면 일터에서는 8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 8만 시간에 대한 준비가 교회에서 없습니다. 대부분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이지 사업 등 직장 가운데 공의, 자비 등의 훈련은 없습니다. 집에서 예배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린이든 청년이든, 교사든 직장에서든 어떻게 예배해야하는지 그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교회는 성도들을 향해 나가라, 나가서 예배하라, 여러분의 몸을 살아있는 영적 예배로 드리라고 해야 합니다.3여 년 전 뉴욕시에 있는 한국교회와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교회가 증축을 위해 허가를 신청했는데 지역에서 이례적으로 교회에 대해 불허처분을 한 일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담은 신문기사를 봤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슬펐습니다. 저는 지역 리더들에게 가서 물어봤습니다.한인교회가 10년 전에 세워졌을 때 지역주민들은 큰 기대를 하며 흥분했다고 합니다. 지역사회를 돕고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인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자기 교회의 일로만 바빴지 남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교회는 모였을 때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계속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저는 스리랑카의 한 교회를 칭찬하고 싶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매년 스리랑카를 방문하는데, 그 나라가 지난해 쓰나미로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스리랑카는 2004년도에 150여 개 교회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방화, 테러, 예배 중 침입 구타 등 박해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런데 쓰나미 이후에 완전히 망가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땅에 남아 있는 건물은 교회 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인 몸으로 드리는 예배
지금 스리랑카 교회는 황무지가 된 땅을 회복하는 선두에 서서 섬기고 있습니다. 폭탄 테러를 일삼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로 와 그 사랑에 감격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 계획했던 테러 계획을 이제 멈춰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스리랑카 교회가 보여준 것이 바로 삶으로 드린 예배입니다.요한복음 4장에서 요한은 사마리아 여인을 기록하며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곳저곳만이 아닌 삶의 어느 곳에서든지 예배하는 자를 만나주겠다는 아름다운 약속을 하시면서 말입니다.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선포한 성전은 성육신한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날이 도래하면 성령이 내주 하는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과 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생수의 강은 성령의 강인데 이것을 마시면 내 안의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성령으로 채우시고 삶을 드리는, 진정한 예배의 통로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정리 차명권 기자salt@onnuri.or.kr
작성자 온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