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광복절 앞두고 꼭 읽어야 할 우리의 역사

전문가 기고

3.1독립만세운동과 유관순 열사 그리고 천안


board image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 세워진 동상>

 

태조 왕건이 ‘직산’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든 이후 비로소 천하가 평안해졌다 하여 ‘천안(天安)’이라 하였다. 고려 말, 류청신이 호두 씨앗을 처음으로 심어 호두과자로 유명한 천안에는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원나라에서 호두를 가져와 심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오랑캐 나라 복숭아’라 하여 ‘호도(胡桃)’라 불렀다. 천안은 삼남지방의 물산이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천안삼거리에는 항상 사람들로 흥성했다. 그런 곳에 독립기념관이 있다. 아마 한번쯤은 가 봤을 것이다. 입구에서 전시관까지 거리가 멀어 더운 날이면 고생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다녀오고서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곳이었다. 규모를 크게 하는데 너무 신경 쓴 나머지 관람객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기억하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해야 하는 장소가 바로 독립기념관이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이 왜 천안에 있게 된 것일까? 천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상해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동녕 선생,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조병옥 박사도 천안 출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안은 독립기념관이 자리 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전국 어디서 오든 접근하기 쉬운 위치인 것도 이유이다. 
태조 왕건이 머물렀다는 성거산 아래 있는 독립기념관은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병천면 용두리)에서 멀지 않다. 유관순 열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화학당, 3.1만세운동, 아우내, 서대문형무소 순국 등 유관순 열사를 대언하는 단어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3.1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아우내 장터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독립기념관과 아우내 장터, 유관순 열사 생가와 매봉교회, 유관순 열사 사당, 매봉 봉화대 등이 근거리에 있다. 우리는 그 유적지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무엇이 유관순으로 하여금 그토록 과감하고 열정적으로 행동하게 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책에서 보았던 역사적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한다면 더 깊은 가슴 울림이 있을 것이다.     
 
유관순 열사, 그 숭고한 이름
 
유관순 열사의 집안은 3대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경우였다. 부친 유중권(柳重權), 모친 이소제(李少梯) 선생은 ‘기독교야 말로 나라를 구할 방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중심으로 지역민들 계몽에 적극 나섰던 인물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농촌사람들을 깨우쳤고, 교회와 학교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민족주의 운동에 매진했다. 유관순은 그런 부모님 아래서 성장했다. 신앙과 애국심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당시는 딸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 고정관념을 과감히 벗어던졌던 부모였다. 샤프(Alise H. Sharp)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유관순을 이화학당에 입학시키기도 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절 정동제일교회를 다녔는데 손정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신앙에너지를 나라사랑 실천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유관순은 새벽에 기도실을 찾아 조국 해방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신실했다. 신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유관순의 생각은 종교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에서 발로된 것이었고, 양자가 서로 응축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과 탄압도 이겨낼 신념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굳건히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해야 할 때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승하했다. 1919년은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일본의 무자비한 폭력적 횡포 앞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조상들은 고종의 승하 소식에 목 놓아 울었다. 그 슬픔의 에너지를 독립운동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외쳤고, 그 운동에 영향을 받은 종교계 지도자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고종의 장례일은 3월 3일이었다. 국장이 나면 시골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와 장례에 참여하는 전통이 있었다. 3월 3일이 지나면 모두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러므로 장례일 전에 거사를 시행해야 했다. 3월 2일은 주일이었기 때문에 그날을 피한 날짜가 바로 3월 1일이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은 이화학당 비밀결사대 일원으로 탑골공원과 서울역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3.1운동에 학생들이 적극 가담하자 일제는 중등학교 이상에 휴교령을 내렸다. 휴교령으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귀향한 유관순은 매봉교회 교인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드디어 1919년 4월 1일 3천여 명이 아우내 장에 모여들며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만세운동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유관순의 눈앞에서 순국했다. 유관순은 천안헌병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모진 고문 중에도 자신이 주모자라 하면서 “죄 없는 사람을 풀어주라”고 외쳤다. 그 후에는 공주로 이송되었는데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잡혀온 오빠 유관옥을 만나 부모의 부고를 전하며 울었다.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여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고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유관순은 이곳에서도 쉬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그때마다 모진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18세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붙잡으며 숭고한 희생을 감당했다. 나라를 구한 잔 다르크가 되고 싶다던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 있던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유관순의 이름을 기억했다.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포기하고 싶었던 민족독립의 열망을 어린 유관순 열사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죽음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는 무덤조차 없다. 이태원에 마련되었으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고향 뒷산 매봉 한 자락에 ‘초혼묘’를 마련해두었을 뿐이다.   
 
3.1독립만세운동의 의미
 
천안 아우내는 두 물이 만나는 곳이다. 두 물이 만나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내라 하였다. 우리나라는 물이 만나는 곳을 ‘아우내’, ‘아우라지’, ‘어을매’ 등으로 불렀다.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 ‘병천(竝川)’, ‘교하(交河)’ 등이다. 아우내와 병천이 같은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병천순대는 알아도 여기가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 현장인지는 모른다. 아우내와 매봉교회를 둘러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유중권과 이소제, 유관순과 유예도 등과 함께 만세를 불렀던 이름 없는 동우(同友)들을 떠올려보자. 신앙과 생활을 별개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준엄한 꾸짖음으로 다가올 것이다.  
3.1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전 세계에 말하기를 “한국인들은 스스로 우리(일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고 선전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보호에 무척 감사해하며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며 거짓 외교를 했다. 그런데 3.1만세운동은 그것이 아니라고 외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일본에 보호를 요청한 적이 없으며, 우리는 강렬히 독립을 원한다”고 소리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 명이었는데 약 2백만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선 셈이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1%정도였는데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은 교회였다.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 구원 역사를 보면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실 주님을 열망한 것이다. 
만세운동이 전 세계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났다. 전 세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던 작은 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졌을 때 강대국 수상들이 모여서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해 회의했다. 그 회의가 바로 ‘카이로회담’, ‘포츠담회담’이다. 그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다. 우리 민족에게 강렬한 독립 의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손을 잡고 독립기념관을 방문해보자. 이제는 입구에서 전시관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 꼬마열차를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다. 냉방이 잘된 전시관을 둘러보면 더위도 이길 수 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 매봉교회도 답사하면서 신앙을 점검하고 충전하면 더욱 좋다.    
/ 임찬웅 집사(남양주 온누리교회, 문화재해설가)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