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기울어가는 배위에서 침묵할 것인가, 진리를 외칠 것인가

우리 생각의 기저가 하나님 중심으로 변해야 한다.
인본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인 신본주의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 가정과 사회의 질서가 잡히고 정이 있는 세상이 된다.
 
생각해 봅시다
 
기울어가는 배위에서
침묵할 것인가, 진리를 외칠 것인가
 
요즘 엄청난 괴리감으로 인해 회의감과 좌절감을 너무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아마 어린 시절 아날로그 사회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과 예절을 배우고, 자연 속에서 뛰어 놀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나와 같은 좌절감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윤리와 도덕이 무너져 내리는 사회적 현상은 타나토스적인 흑구름 속에서 자살과 폭력과 존속 살인과 왕따와 음란과 극도의 이기적인 뉴스를 토해 내고 있다. 어느덧 인간은 돈과 권력과 경쟁의 노예가 되어 타인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공식이 사회의 기저가 되어 있다. 직업에 대한 소명도 빛을 잃어간다. 교사라는 직책의 고유성과 고귀함은 쌍둥이 딸의 점수를 올리기 위해 행한 범죄로 땅에 떨어져 버렸고, 일부 목회자는 성과 돈과 권력과 세습으로 교회의 신성함을 버리고, 사회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정치인들은 평화를 가장한 독주를 하고 있다. 유치원을 보내는 엄마들은 분노하고, 사춘기 아이를 둔 부모들은 살얼음판을 거닐며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작전을 편다. 스스로 적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점수에 맞춰 네모에 구겨 넣듯 소망 없이 들어간 대학을 꾸역꾸역 다닌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면 갈 곳이 없어 젊은 자의 소망은 또 한 번 내동댕이쳐 버려진다.
 
 
“돌이키라,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도대체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라는 말인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인간은 왜 변화가 없는 가에서부터 차세대의 교육은 표류하고 있고, 도대체 주일마다 외치는 복음에는 왜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왜 우린 기계적으로 주일을 지키고 있는가? 사정없이 내 머리를 때리며 아프게 하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나름 차세대에서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주님의 말씀에만 소망이 있다고 열변을 토하고, 성령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주 공허하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순간 성경에서 수없이 반복되게 말씀하는 “돌이키라,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다. 우리의 우상숭배와 음란과 죄를 지적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애타고 애절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씀하시는 그 아버지가 다가온다. 늦게야 철들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식처럼 아버지가 보이고 들린다. 이런 사회를 보면서 더욱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이 된다.
생명이 없는 유교의 삼강오륜이 더 도덕적이고 질서가 있는 것은 왜일까? 성경은 가장 중요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얻었으면 예수의 제자답게 살으라는 인성과 도덕성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어주라,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라는 이타적인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으로 똘똘 뭉치고 있는가. 달라스 윌라드 박사가 한 “현대는 뱀파이어 신앙의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예수 보혈의 공로로 구원만 받은 장애인 그리스도인, 병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과연 영성과 인성은 분리된 개념인가 아니면 통합적인 개념인가?’라는 기본적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타인이 보기에 영성 깊은 부모의 아이 사랑은 얼마나 자기중심적 아이 사랑인지 모른다. 모든 것이 자기 자녀에 초점이 맞춰진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실히 자녀가 우상임을 자인하는 것을 현장에서 바로 본다. 그렇다. 우리 생각의 기저가 이미 자기중심적 사상으로 눈에 보이는 돈과 화려함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미 사회전체가 기울어져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사회는 자녀교육을 믿음보다 돈과 학원과 점수로 연결하도록 기울어져 있다. 교회는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묵인하며 ‘그래도 믿음이 최고’라고 말한다. 어느 땐 허공에다 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회는 디지털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 더 빠른 광속의 5G시대로 달려감으로 가속이 붙었다. 아프리카의 스프링 벅 산양처럼 뒤에서 오는 산양 떼에 밀려 과속하며 질주하고 있다. 결국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산양 떼처럼 절벽으로 치달아 가는 건지도 모른다.
프란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인본주의는 파괴적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인본주의적 파괴적 욕망은 우리의 자유와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까지 쳐서 허물어뜨리려는 강렬한 욕구이다.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신 지식을 파멸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가치의 죽음이 지식의 죽음과 더불어 찾아올지라도 그 일을 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결국 자기중심적사상인 인본주의는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고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첫째는 퇴보, 타락, 부패, 폭력을 위한 추구로 인한 파괴다. 둘째는 사회는 혼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집단이나 어떤 엘리트가 그 공백을 채우는데 그 엘리트가 자의적인 절대 기준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말릴 것인가? 사회는 침묵하는 다수와 소수로 구분되어 있고, 소수는 가치에 대한 참된 기반이 있는 기독교인이거나 적어도 가치가 참으로 존재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다수에게 남아 있는 것은 개인적 평안과 풍요라는 두 가지 빈곤한 가치뿐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다수의 개인적인 평안과 풍요가 유일한 가치이므로 모든 정치인들도 법을 그 기준에 맞춰 제정하기 때문에 진정한 가치인 진리는 점점 쭈그러진다.
성경에서도 인간들이 바알과 아세라의 풍요의 신을 섬겼듯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다수가 반응하고, 소수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관심을 갖고 진리 되신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휴가 때 북유럽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갔었다 해도 그 나라를 속속들이 보고 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북유럽의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복지가 잘 되어 있다. 3시에 퇴근하고도 GDP가 5~10만 달러나 된다. 국민 모두가 의료비와 대학등록금이 무료이니 얼마나 좋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인권과 평등과 행복과 풍요가 제일 중요한 가치가 되어 있으니 그들에게는 구태여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복지와 영성의 관계는 반비례인가?
 

자기중심 사상 인본주의에서
하나님중심 사상 신본주의로!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데 과연 ‘헤븐조선’은 될 수 없을까? 에스겔 37장은 이미 이스라엘 족속이 마른 뼈가 된 환상을 보여 주시고 여호와의 영으로 덮으시어 힘줄과 살갗이 입혀져서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있으면 소망이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위한 계획이지 재앙이 아니요 우리에게 미래와 소망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산들과 장애물이 많이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간성 소외와 컴퓨터와 SNS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견디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아주 얄팍한 인간으로, 분노조절장애 인간으로, 음란물과 폭력의 홍수로 인한 타락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감정까지 입힌 로봇과 챗봇과 사랑하며 혼자의 삶을 즐기는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 비혼, 솔로가미(자기 자신과 결혼 하는 것), 심지어는 자궁은 내 것이므로 편하게 살려고 자궁적출수술까지 하는 사회가 되었다.
자녀 출산은 돈이 많이 들고, 자신의 경력이 단절되고, 귀찮고,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라는 생각 때문에 결혼뿐만 아니라 자녀출산을 피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여 기울어져가고 있음에도 갑판의 바이올리스트들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를 연주했다. 우리가 할 일은 끝까지 연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는 연주를 해야 한다. 자녀는 돈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키우는 것이라고,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외치며 연주해야 한다. 먼저 믿는 부모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 헤븐조선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른 뼈가 살아 일어나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으므로 우리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할 때 생기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한국 교인들은 일주일에 한번 설교를 듣고 믿음 생활을 한다”고 일침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성도들 안에서 성경 읽는 습관 실종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했다. 성경을 읽고 통독해야 하나님의 세계관이 튼튼하게 세워진다. 우리에게 세상의 뉴스와 지식만 들어간다면 어쩔 수 없어 자기중심 사상이 가득 찰 수밖에 없다. 매일 성경을 읽고, 통독과 큐티와 기도를 하면 우리의 생각의 기저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중심으로 변할 것이다. 자기중심사상인 인본주의에서 하나님 중심 사상인 신본주의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 자녀를 키우는 것과 가정과 사회의 질서가 잡히고, 아름답고 사랑이 풍성하며, 정이 있는 세상이 된다. 결국 통독, 큐티, 기도가 인생의 솔루션이며 해답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1장과 시편 1편에서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면 형통의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김정순 목사(부천 온누리교회)

 

작성자  김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