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소설 <한 톨의 밀알> 읽어보셨나요?


예수 둘러싼 배반의 서사(敍事)로 아프리카 역사 해석


board image
_케냐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와 그의 작품 <한 톨의 밀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아프리카 작가와 문학작품은 많지 않다. 지리적으로도 멀지만 무엇보다도 실리적으로 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흑아프리카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오지여행에 적합한 이국적인 땅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과 가뭄, 질병으로 대표되는 어두운 소식이 들려오는 대륙으로 각인되어 있다.
지구 끝의 소식조차 거의 동시적으로 모두에게 전달되는 유비쿼터스 정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아프리카 소식도 실시간으로 들려오기에 이 대륙에서 울려오는 신음 소리에 무관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땅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땅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이 상당수 남아있어 선교사들의 가슴을 뛰게 하며, 지난 세기에 이어 여전히 아프리카 곳곳에서 부흥 소식이 들려온다. 
패트릭 존스턴은 <세계 교회의 미래>에서 2050년에는 아프리카에 전 세계 기독교인의 44%가 포진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적 열정이 우리로 하여금 이 검은 대륙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아프리카 대륙에도 종족 수만큼이나 많은 종족 언어로 쓰인 문학이 풍성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이 먼 이웃인 우리에게 도달하는 과정이 수월치 않다. 더구나 종족어로 쓰인 대부분의 아프리카 문학은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유럽의 언어들을 통과하지 않고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이 땅의 딜레마이다. 이것은 1884년 베를린회의에서 합의된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식민지역 분할 결과로 종족이나 언어 혹은 문화적인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국경이 그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지도에 언제라도 분쟁이나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인위적으로 그어진 직선의 국경이 눈에 아프게 밟힌다. 이 대륙의 평화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Ngugi Wa Thiongo)’는 이 분할에 대해 “유럽 국가의 언어 분할을 따른 것”이라고 일갈했다. 아프리카의 문학작품은 이런 역사적 흔적과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기에 아프리카 문학작품들은 어떤 입문서보다 아프리카의 문화와 삶의 구체적인 양상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의 
소설 <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티옹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국 식민지였던 케냐에서 자랐고, 청년 시절인 1963년 케냐의 독립을 본 작가답게 그의 작품들의 소재는 케냐의 독립과 여전히 식민주의가 지속되는 독립된 케냐의 초토화 되어가는 현실을 다룬다. 이러한 작품의 주제는 체제의 미움을 사기에 그의 삶은 아프리카의 신산스러운 역사를 닮아 투옥과 망명, 유랑으로 점철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고린도전서 15장 36~37절 말씀을 머리말로 새기면서 시작하는 <한 톨의 밀알>은 이제는 고전이 된 응구기의 대표작이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작품의 제목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빌려왔기에 성경의 두 인용 구절은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케냐의 독립을 위해 ‘한 톨의 밀알’이 되고 사망한 ‘키히카’라는 청년을 둘러싸고 몇 겹으로 일어나는 배반과 작품에서 ‘유다’로 지칭되기도 하는 배반자들의 죄의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의 전체적인 어조는 역설적이게도 매우 서정적인 내적 독백으로 시종일관 이끌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케냐의 작은 농촌마을 타바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는 아프리카의 장대한 자연풍광에 대한 묘사도, 대자연 속 모험담도 담겨있지 않다. 작품이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이 작품의 실리는 작가의 의도가 더 깊은 곳에 있음을 얘기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 톨의 밀알>이 케냐의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것은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덕적 갈등이기 때문이다. 
배반당해 죽었기에 작품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청년 키히카가 있다면, 그와 독립군들을 도운 영웅으로 추앙되는 ‘무고’라는 인물이 있다. 그를 영웅으로 추대하려는 주변의 격앙에 무고는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무고의 이러한 은자적인 면모로 인해 그에 대한 주민들의 평가는 더 높아져만 간다. 그런 평가와 반비례해서 작품은 매 단계 무고의 내면적 갈등을 대비적으로 그려낸다.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받은 고통의 기억들이 뒤섞이는 갈등의 심리 속에서조차 사실 그가 저지른 일은 마치 내면적으로 스스로 검열되듯이 분명하게 발설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 아름다운 케냐를 상징하듯 생명과 정열을 현현하는 여성 ‘뭄비’가 있다. 키히카의 여동생인 뭄비의 순수한 눈빛 아래서 무고는 자신이 바로 그녀의 오빠이자 독립의 진정한 영웅인 키히카를 죽인 배반자임을 고백하며 그녀 앞에 무릎 꿇는다.
<한 톨의 밀알>은 얼굴 없는 주인공 키히카가 남긴 성경에 밑줄 그어져 있던 구절을 몇 번에 걸쳐 인용하면서 사건의 장을 나눈다. 일종의 작품의 이정표이기도 한 이 구절들을 통해 독자는 이 작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배반의 서사(敍事)를 확장시켜 아프리카의 역사를 해석해보려 한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기에 흥미롭다. 
케냐의 독립은 인물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것처럼, 항거와 투쟁과 수용소에서 보낸 고통스러운 시간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무고의 배반과 고백과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회개가 절대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물론 작품 안에는 뭄비를 사이에 두고 애정 경합을 펼치는 ‘기코뇨’와 ‘카란자’의 드라마도 있다. 무고와는 다른 이유지만, 이들도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배반한 경력의 인물들이다. 이 주변인물과 무고와의 차이점은 무고에게는 배반에 대한 실존적인 고뇌와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유다인 무고는 고백과 회개를 통해 작품 속에서 거듭난다. 작품은 케냐의 정치적인 해방에 못지않게 그의 존재가 고백과 회개를 통해 배반의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은 마무리 부분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무고의 고백을 넣음으로써 독자들이 요한계시록 2장 1절 말씀을 상기하도록 이끈다. 
이 작품에서 한 나라의 진정한 독립과 해방은 한 인물의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해결과 괘를 같이 한다. 그것이 국가적 차원의 것이든 한 개인의 영역의 문제이든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자유의 획득은 도덕적인 회복에서 완결되는 것임을 <한 톨의 밀알>은 무고라는 인물의 내적, 외적 여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응구기가 말하고자 하는 케냐의 진정한 독립이자 해방인 것이다. 아프리카의 현실을 현상적이며 사실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한 여타의 아프리카 작품들과 응구기의 <한 톨의 밀알>이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용서, 고통 받은 사람의 전권이자 특권 
 
<한 톨의 밀알> 이후 응구기는 체제 비판적인 작품들로 인해 투옥과 망명을 거듭하는 고초를 겪으며 유랑의 삶을 살았다. 그의 작품도 이후 변화를 겪는다. 아프리카가 유럽에서 받은 상처는 응구기로 하여금 그를 구성했던 유럽의 식민지적 특징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그 흔적들을 지운다. 세례명, 영어를 버리고 원래의 응구기 와 티옹오로 돌아오며, 종족 언어인 키쿠유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그 상처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프리카의 현실을 온전히 접할 수 없다. 유럽과 아프리카 인접한 이 두 대륙에서 사과와 용서의 상호적 노력이 없는 한 이 골은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영적으로 메마른 유럽의 진실어린 사과의 때보다 아프리카에 임할 용서의 때가 더 기대되는 즈음이다. 용서는 주님의 명령이며, 고통을 받은 사람만이 베풀 수 있는 전권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 최윤 교수(프랑스어예배, 소설가, 서강대 명예교수) 

 
<발문>
“용서는 주님의 명령이며, 
고통 받은 사람만이 베풀 수 있는 
전권이자 특권이기 때문이다.”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