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일과 땀과의 관계 그리고 가치
전문가 기고
일과 땀과의 관계 그리고 가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사용하던 말 중에 ‘불한당(不汗黨)’이 있었다. 불량배들이나 폭력배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한자를 잘 몰라서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의 무리’라는 뜻이었다. 이 말인즉,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정상적인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 일해야 한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일과 땀과의 관계의 정립할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땀을 흘리게 되고, 땀을 흘리는 사람은 곧 일하는 사람이다.
땀 흘리면 부를 이룰 수 있지만,
쉽게 돈 벌려고 하면 이루지 못한다
쉽게 돈 벌려고 하면 이루지 못한다
땀을 흘리는 일은 1차적으로 육체노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사회에서도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신체활동을 많이 하는 일을 의미한다. 잠언에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찌들게 가난하다”(잠 28:19)는 말씀이 있다. 땀을 흘리면서 일하면 부(富)를 이룰 수 있지만, 땀을 흘리지 않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부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육체노동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디지털화로 인해 실제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직업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 외에 정신적인 노동을 하거나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땀 흘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고가 필요한 모든 일들은 땀을 흘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을 때(창 1:28)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즐겁고, 신나고, 의미 있게 해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일할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는 일하면서 육체적인 땀을 흘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흘린 땀은 고통과 수고의 땀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의 땀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고, 사람이 하는 일에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일평생 수고해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것이다”(창 3:17).
이때부터 사람들이 흘리는 땀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저주로부터 회복을 시작했지만(골 1:20), 여전히 사람들은 일하면서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땀 흘리는 수고를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골 3:23).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21).
육체노동을 비롯해서 고통이 따르는 일들을 주께 하듯 해야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적성이 맞지 않거나 그것을 감당하기에 신체적인 한계를 가졌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노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노동은 좋은 경험이 되고, 영적으로도 좋은 훈련과정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하기 전에 율법수업을 하지 않고 ‘목수’라는 노동을 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사회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디지털화로 인해 실제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직업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 외에 정신적인 노동을 하거나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땀 흘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고가 필요한 모든 일들은 땀을 흘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을 때(창 1:28)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즐겁고, 신나고, 의미 있게 해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일할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는 일하면서 육체적인 땀을 흘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흘린 땀은 고통과 수고의 땀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의 땀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고, 사람이 하는 일에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일평생 수고해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것이다”(창 3:17).
이때부터 사람들이 흘리는 땀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저주로부터 회복을 시작했지만(골 1:20), 여전히 사람들은 일하면서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땀 흘리는 수고를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골 3:23).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21).
육체노동을 비롯해서 고통이 따르는 일들을 주께 하듯 해야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적성이 맞지 않거나 그것을 감당하기에 신체적인 한계를 가졌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노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노동은 좋은 경험이 되고, 영적으로도 좋은 훈련과정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하기 전에 율법수업을 하지 않고 ‘목수’라는 노동을 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
지점에 소명이 있다
나는 7년 전부터 프랑스에 있는 ‘미션디모데’라는 공동체 교회와 교류하고 있다. 그곳을 방문하면서 가장 도전이 되었던 것은 다음세대의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위한 공동체 훈련을 3년에 걸쳐서 한다는 점이었다. 이 훈련과정에는 성경과 신학공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남자들은 건축이나 건물 보수, 목공 일을 하기도 하고, 자동차 정비를 한다. 여자들은 건물 관리나 부엌 일, 빨래나 재봉과 관련된 일을 한다. 훈련을 마친 후에도 그 영역의 일을 지속하는 사람도 있고, 설교자가 되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서는 목회자이거나 설교자이거나 혹은 또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가정주부로 살게 되었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데 육체노동은 필수적인 훈련으로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도 신학공부를 할 때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다양한 노동을 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했던 일이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보다 더 큰 유익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훈련을 하든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든지 땀 흘리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는 육체노동의 영적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뷰크너는 “자신에게 있는 열정과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고 했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다. 직업이 소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소명을 찾지 못한다. 땀 흘리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좋겠는데 많지 않다. 그래서 땀 흘리는 일을 소명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신 것이나 바울이 텐트 만드는 일을 한 것은 개인의 열정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 아니었을까? 개인의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곳에 더 많은 소명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에 경제적인 책임 때문에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일이 그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일시적 소명’이었다. 그때의 육체노동 경험은 내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실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다. 그러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실업 문제를 다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육체노동을 먹고 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일이 젊은이들에게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일시적 소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실업 문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훈련을 하든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든지 땀 흘리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는 육체노동의 영적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뷰크너는 “자신에게 있는 열정과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고 했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다. 직업이 소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소명을 찾지 못한다. 땀 흘리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좋겠는데 많지 않다. 그래서 땀 흘리는 일을 소명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신 것이나 바울이 텐트 만드는 일을 한 것은 개인의 열정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 아니었을까? 개인의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곳에 더 많은 소명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에 경제적인 책임 때문에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일이 그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일시적 소명’이었다. 그때의 육체노동 경험은 내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실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다. 그러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실업 문제를 다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육체노동을 먹고 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일이 젊은이들에게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일시적 소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실업 문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작성자 김영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