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나와 함께 부활하라! 온전히 거듭나라!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안토니오 코레지오가 그린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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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인류를 위한 사랑’을 확증하는 대사건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제자들의 자세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 베드로와 요한의 유형이다. 그들은 부활의 첫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전갈을 들고 쏜살같이 달려갔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긴가민가했다. 
두 번째, 도마의 유형이다. 도마는 부활의 첫새벽에 어디 있었는지 기록이 없다. 그러나 도마는 그날 저녁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세 번째,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유형이다. 그들은 길을 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일행 중에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네 번째, 막달라 마리아 유형이다. 오늘 묵상할 본문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를 다룬 요한복음 20장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3대 사건을 모두 목격한 유일한 제자이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던 그녀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지만 이내 이를 믿고 받아들인다. 
 
부활의 첫새벽에 만난 
마리아와 예수님
 
오늘 본문과 함께 묵상할 성화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 안토니오 코레지오가 그린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이다. 놀리 메 탄게레는 ‘나를 만지지 말라’는 뜻의 라틴어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무덤에 묻힌 이후 사흘째 되는 날 새벽,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무덤이 있는 동산에 도착했다. 옥합을 깨뜨려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던 그 마리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동산의 동굴을 파서 만든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울다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두 천사가 있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사람들이 주의 시신을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예수님이 거기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했다.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네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지기인 줄 안다. 
“당신이 그분을 어디로 옮겨놓았다면 가르쳐 주세요. 내가 그분을 모셔갈게요.”
예수님은 아직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가 답답했던지 친히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다. “마리아야!” 
귀에 익은 음성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렸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찬 49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그렇게 낯선 동산지기는 마리아에게로 와서 예수님이 되었다.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은 믿었지만 ‘예수님이 가야할 길’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스승님!”
울면서 한사코 예수님을 붙들고 늘어지려는 마리아. 예수님은 한 손은 마리아를 만류하고, 다른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 20:17). 
코레지오가 그린 이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자신을 부르시는 부활한 예수님의 목소리에 놀란 마리아는 시선을 예수님의 얼굴에서 떼지 못한다. 양팔을 뒤로 한 채 엉거주춤해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슬픔과 부활이라는 기쁨 사이에서 어리벙벙한 상태이다. 마치 “쿼바디스 도미네”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묻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것은 예수님과 마리아의 이 만남이 부활한 예수님의 승천을 알리는 선포식이자,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부활을 세상에 알리는 메신저로 보내는 파송식이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당신이 메시아임을 선포하고 이를 마을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자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전파했던 사건(요한복음 4장)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는 친히 도마의 손을 이끌어 당신의 옆구리에 찔러 넣게까지 하신 예수님께서 왜 마리아에게는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까? 도마의 경우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의 차원이었다. 도마와 달리 마리아는 부활은 믿었다. 하지만 예비하신 길을 위해 떠나가야 할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고 과거에 집착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부활의 첫새벽이 도래했음을 알리라는 미래적 소명을 부여하시며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새로운 에덴동산의 ‘동산지기’
 
동굴은 생명의 탄생과 부활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죽음의 장소라는 이중적인 상징을 가진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동굴을 파서 만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신 곳도 동산의 동굴 속 무덤이었고, 부활하신 곳도 바로 그 동굴이었다. 동굴에서 태어나고 묻혔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인류의 첫새벽을 열었다. 코레지오의 그림 속 원경은 어둠을 헤치고 동이 터오는 여명(黎明)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신학자 존 샌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주의 첫날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인류의 삶에서 새 날이 밝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새로운 의식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코레지오의 그림에서 예수님의 왼발 아래쪽에 괭이가 보인다. 다른 화가들도 통상 삽이나 곡괭이, 호미 등 농기구를 예수님과 함께 배치해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눈에 동산지기로 보였음을 표시한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님이 왜 하필 동산지기로 보였을까? 원래 여호와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손수 빚으신 최초의 인간들을 거기에 두셨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도 좋은 온갖 열매를 맺는 나무들 속에서 ‘동산지기’ 혹은 ‘정원지기’인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창 2:8~9). 그렇다! 부활하신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동산의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시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에덴동산의 창설을 준비하시고 그 동산의 동산지기, 정원지기를 자임하셨다. 그런 맥락에서 막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눈에 동산지기로 보였지 싶다. 
우리는 아니 나는 어떤 유형일까? 엠마오 도상에서 온종일 동행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제자들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닐까? 그들은 저녁식사 시간에 겨우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주님은 곧장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겨우 알아본다면 예수님은 번번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실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애타게 찾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가장 잘 말한 사람은 융심리학자 안셀름 그륀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 손을 들어 내 두려움과 좌절, 슬픔과 어둠의 무덤에서 나도 어서 부활하라 이르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도 “너희들도 나와 함께 부활하라! 온전히 거듭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 손을 들어 내 두려움과 좌절, 
슬픔과 어둠의 무덤에서 나도 어서 부활하라 이르신다.”

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