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4일 토
칼럼

[신앙에세이] 하나님을 아는 관상(contemplation)

신앙에세이 
 
하나님을 아는 관상(contemplation)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토마스 머튼은 <새 명상의 씨>에서 ‘관상(contemplation; 명상,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주팔자나 점을 볼 때 쓰이는 관상(觀相)과는 동음이의어일 뿐 전혀 상관이 없다. 
“관상은 지적이며 영적인 삶의 최고의 표현이다. 깨어 활동하며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그 자체이다. 이것은 영적 놀라움으로 생명의 신성성, 존재의 신성성에 대해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경외이다. 또한 이것은 생명, 의식, 존재에 대한 고마움, 생명과 존재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며 무한히 풍요로운 원천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것이고, 그 원천의 실체를 인식하는 영적 통찰력이다.”  
머튼은 원천의 실체가 바로 하나님이며, 관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자기를 만져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할 때의 ‘안다’는 어떤 실재를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인식이란 증명 혹은 정의가 가능한 인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주체와 객체로 객관화해서 인식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관상은 이러한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화를 초월하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이것에 대해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관상은 보다 깊은 믿음이며 형상이나 말, 명확한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지식이다. 말과 상징으로 암시될 수는 있지만, 그 아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순간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고, 확인했던 것을 부정하게 된다. 관상 중에 우리는 알지 못하므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는 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을 모두 초월하여 안다.” 
관상이란 각자가 막연하게 믿는 것을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로는 ‘체험’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하고자 하는 하나님은 실제로 살아계신 신이다. 철학자의 추상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볼 수 있거나 우리의 정신이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초월해서 저 멀리 무한한 곳에 계시는 분이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줄 수도 없다면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 암흑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 주는 어떤 상상도 결국에는 우리를 오해하게 만든다.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 상상도 없고 어떤 창조된 것과도 비슷한 데가 없는 불명료함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실 그대로 알 수 없다.”
이러한 불명료함, 불분명함은 우리의 믿음이 자랄수록 나 자신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는 깨달음에서 오는 무력함과 함께 느껴지게 되고, 더 큰 의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믿음이 공고한 사람에게 불명료함으로 인한 의심이 더 크게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머튼은 “믿음의 그 불명료함이 바로 완전한 믿음의 논거”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암흑과도 같은 그 불명료함 속에서 진정 하나님을 아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최혁중 목사(남양주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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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