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십자가, 회복적 정의의 진수
신앙에세이
십자가, 회복적 정의의 진수
고난주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 이 질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지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틀림없는 성경적 생각이다(고후 5:21, 사 53:5). 그렇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른바 ‘처벌대속론’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처벌함으로 그분이 요구하시는 정의를 충족시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1세기 중세 신학자 안셀름의 책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발전되어 나온 개념이다. “하나님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적 존재에 의해 치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생겨난 것이다. 이 입장으로 보면 하나님은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를 추구하는 분이다. 정의를 위해 반드시 보복해야 하고,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분이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떤 집사님이 안 믿는 아들에게 “왜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들이 “자기 아들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아버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보복적 정의를 추구하는 신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보복적 정의를 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추구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편적 정의(당시 눈을 다치게 하면 얼굴을 상하게 하고, 상처가 생기면 생명을 멸하는 보복행위가 유행하였다)를 말씀하셨지만, 실상 죄지은 자를 처벌함으로 정의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말씀을 따르는 자를 의로 여기셨다(창 15:6).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의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이 땅에서 결코 누구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셨다. 그분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셨다.
십자가는 보복적 정의에 의해 희생된 제물로만 여겨질 것이 아니라 한 번의 희생으로 모든 관계를 회복시킨 회복적 정의의 산실로 여겨져야 한다. 실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선택하셨다. 말 없는 순종을 하셨고, 죽음의 종노릇 하는 우리에게 다가가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그것은 분명 거래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만일 용서를 값을 지불하고 살 필요가 있다면 용서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거저 용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죗값을 다 치렀다는 완성의 의미도 있겠지만, 보복 없이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실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호 6:6)을 인용하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물이 되시기 전에 이미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루셨다.
오직 사랑만이 죄를 멸하고 정의를 세울 수 있다. 희생과 제물을 강조하는 종교는 보복적 정의의 틀에 갇혀 버리고 만다. 그러나 십자가는 악을 선으로 갚고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회복적 정의의 진수로 남아있다.
/ 허원희 목사(남양주온누리교회)
고난주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 이 질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지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틀림없는 성경적 생각이다(고후 5:21, 사 53:5). 그렇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른바 ‘처벌대속론’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처벌함으로 그분이 요구하시는 정의를 충족시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1세기 중세 신학자 안셀름의 책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에서 발전되어 나온 개념이다. “하나님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적 존재에 의해 치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생겨난 것이다. 이 입장으로 보면 하나님은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를 추구하는 분이다. 정의를 위해 반드시 보복해야 하고,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분이 되어 버리고 만다.
어떤 집사님이 안 믿는 아들에게 “왜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들이 “자기 아들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아버지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보복적 정의를 추구하는 신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보복적 정의를 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추구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편적 정의(당시 눈을 다치게 하면 얼굴을 상하게 하고, 상처가 생기면 생명을 멸하는 보복행위가 유행하였다)를 말씀하셨지만, 실상 죄지은 자를 처벌함으로 정의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말씀을 따르는 자를 의로 여기셨다(창 15:6).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의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이 땅에서 결코 누구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일을 하셨다. 그분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셨다.
십자가는 보복적 정의에 의해 희생된 제물로만 여겨질 것이 아니라 한 번의 희생으로 모든 관계를 회복시킨 회복적 정의의 산실로 여겨져야 한다. 실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선택하셨다. 말 없는 순종을 하셨고, 죽음의 종노릇 하는 우리에게 다가가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그것은 분명 거래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만일 용서를 값을 지불하고 살 필요가 있다면 용서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거저 용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죗값을 다 치렀다는 완성의 의미도 있겠지만, 보복 없이도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실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호 6:6)을 인용하며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물이 되시기 전에 이미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루셨다.
오직 사랑만이 죄를 멸하고 정의를 세울 수 있다. 희생과 제물을 강조하는 종교는 보복적 정의의 틀에 갇혀 버리고 만다. 그러나 십자가는 악을 선으로 갚고 자격 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회복적 정의의 진수로 남아있다.
/ 허원희 목사(남양주온누리교회)
작성자 정현주









